[14호 / 2023/12]14호 [포커스 온 특집] 일상적 평화 : 갈등 사회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만드는 평화

평화저널 플랜P
2024-01-13


일상적 평화 : 갈등 사회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만드는 평화

 

글 허지영 박사(강원대 통일강원연구원)

 

평화, 통일을 넘어

 한국에서 평화는 곧 통일로 받아들여진다. 오랜 분단의 탓일 것이다. 하지만, 과연 통일이 된다면 한반도에 평화는 자연스럽게 도래하는 것일까? 오랜 분단 동안 상이한 정치·경제 체제 속에 살아온 남북한 주민의 삶이 하나의 공동체로 통합되고 갈등 없이 영위될 수 있을 것인가? 평화는 통일 또는 국가건설(state-building) 차원을 넘어서는 폭 넓고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는 개념이다. 흔히 갈등이 전혀 없는 상태를 평화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평화학에서 논의되는 갈등전환(conflict transformation) 이론은 인간 사회에서 근본적으로 갈등은 소멸될 수 없다는 전제를 토대로 갈등이나 분열이 비폭력적이고 파괴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해소되는 상태를 평화라고 본다(Kreisberg, 2011). 즉, 개인과 공동체 간 분쟁과 갈등의 발생 자체를 막는 것은 불가능하며, 평화는 갈등을 평화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국가 차원에서는 국가 간 갈등이 발생하더라도 무력이 아닌 외교나 협상을 통해 해결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전쟁이나 폭력 갈등을 경험한 이후 평화로 전환된 여러 사례에서 분쟁의 공식적 종식 이후 사회통합, 사회재건, 평화구축 과정에서 전혀 다른 갈등 요인이 등장해 혼란을 겪거나 다시 폭력 분쟁으로 회귀하는 일이 다수 발생했다(이성용, 2022). 통일정책이나 대북정책을 둘러싸고 2000년대 초반 시작된 남남갈등이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채 지역·성·세대와 같은 다른 요인과 중첩되며 깊은 혐오와 분열 현상으로 나타나는 한국 사회 현실을 고려한다면, 한반도 평화구축 논의에도 정치적으로 남북한이 통일에 합의한 이후 주민 간의 화해와 통합의 과정까지 포함될 필요가 있다. 특히 남북한과 같이 오랜 분쟁을 경험한 국가 간에는 평화의 지속성을 유지하는 것이 어려운데, 평화적 관계를 제도화할 뿐만 아니라 상호 적대와 혐오의 감정과 정동이 변화되고 공존과 화해의 관계로 전환되며 공통의 정체성을 발전시키는 과정이 필수다. 이를 위해서는 국가뿐만 아니라 지방정부, 시민사회, 교육계, 종교계, 일반 시민을 아우르는 다양한 행위자들이 갈등을 전환하고 평화를 구축하는 과정에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여전히 평화가 통일, 즉 남북한 ‘통일된 국가건설 프로젝트’라는 제한적인 인식이 보편적이다. 이에 대한 반성적 시각을 바탕으로 본 글은 갈등과 분쟁으로 심각하게 분열된 사회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일상에서 주체적으로 만들어 가는 평화의 중요성에 주목하는 ‘일상적 평화(everyday peace)’ 개념을 살펴보고 한반도의 평화구축에 대한 함의를 발견하고자 한다.

 

지속 가능한 평화와 로컬의 참여

과거 평화구축은 주로 북미와 유럽 국가 중심으로 구성된 국제기구나 비정부기구(NGO)가 서구에서 발전된 정치·경제 시스템을 탈 분쟁 지역에 일률적으로 적용하는 방식으로 진행됐으며, 이를 자유주의 평화구축(liberal peacebuilding)이라고 한다(Richmond, 2011). 자유주의 평화구축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발전된 대안적 개념이 포스트자유주의(post-liberal peace)로 평화구축에 있어 지역을 가장 잘 이해하는 로컬행위자들의 참여를 강조한다. 탈 분쟁 사회에서 평화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애초에 전쟁이나 폭력 분쟁이 발생한 역사적 배경이나 해당 사회의 정치, 문화, 구조적 맥락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 중요하며, 따라서 로컬을 잘 이해하는 지역정부, 지역기반 시민사회, 지역의 평범한 개인들의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참여를 강조하는 개념이다.

일상적 평화는 포스트자유주의 담론 중에서도 가장 개인적이고 미시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평화로 분열이 심각하고 갈등이 만성화된 사회를 살아가는 평범한 개인들이 일상에서 갈등을 회피하고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 활용하는 일련의 사회적이고 평화적인 행동양식과 사고방식을 의미한다(Mac Ginty, 2021). 국제기구와 같은 외부행위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식되는 평화구축과는 달리 일상적 평화는 해당 지역에 이미 존재하는 규범이나 관행에서 비롯된다. 자유주의 평화구축에서는 평범한 개인들이 원조나 평화구축의 수동적인 수혜자, 또는 분쟁의 피해자로서만 인식되었다면, 일상적 평화 평범한 개인을 평화구축에 있어 주체성을 가진 행위자로 인식하게 되면서 평화 연구에 중요한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또한, 거시적이고 정치적인 사건이 발생하는 ‘배경’으로서 일상에 대한 인식을 넘어 ‘사회적 세계’로서 일상을 인식하게 되었고, 평범한 개인들의 평화적 사고방식과 관행이 거시적 차원의 평화구축에 지니는 의미에 주목하는 계기가 되었다(Mac Ginty, 2014). 일상의 사소해 보이는 모든 장소와 사건에는 실상 정치적인 의미가 담겨있다. 일상의 미시적인 활동이나 사고방식은 얼핏 보기에는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거시적인 체제의 일부이자, 체제를 구성하는 중요 요소이다. 다시 말해 일상은 사회체제, 규범, 질서와 같은 구조적 차원과 개인의 일상적인 행동양식과 담론이 교차하며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 사회적 공간이다.

분쟁종식과 평화구축을 위한 외교나 협상이 이루어지는 거시적 차원과 일상을 결합하려는 시도는 평화가 풀뿌리 차원에서 구축되어야 함을 주장하거나 거시적 차원의 평화구축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평화구축 과정에서 일상이라는 사회적 공간과 당연하게 여겨지는 소소한 평화적 관행, 그리고 평화를 만들어 나가는 데 기여하는 평범한 개인의 주체성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일상적 평화는 탈분쟁 사회에서 평화구축이 새로운 ‘국가 건설(statebuilding)’ 프로젝트로 인식되는 자유주의 평화 모델을 넘어 평화의 지속성을 확보하기 위해 지역적이고 미시적인 차원에서 형성되는 평화의 중요성에 주목하려는 시도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일상의 사소한 관행과 사고방식은 해당 사회의 독특한 정치, 문화, 역사적 맥락을 이해해야 정확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갈등과 분열이 심한 사회의 일상에서 지극히 당연하고 정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행동이나 사고방식은 그렇지 않은 사회에서는 비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또한, 상대 집단의 사람에게 베푸는 개인 차원의 매우 사소한 행동일지라도 해당 사회를 지배하는 분열과 대립의 경계를 넘어서기 위해 상당한 용기와 결단을 필요로 한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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