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카테고리]7호/2022.03 [전문공개/P-word특집] 각자도생의 사회:공공성과 대화하기

플랜P
2022-03-16

       

                                                                                                                                                             글 /목광수

                                                                                                                                                           서울시립대 철학과 교수


*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시대: 공공성(公共性) 상실

    2020년 시작된 코로나19 팬데믹은 세계 경제 10위권 국가일 뿐만 아니라 K-POP이나 K-Movie 등을 통해 문화적으로도 주목받고 있는 우리 사회의 ‘민낯’을 드러냈다. 사회적으로 방치되고 낙후된 시설인 폐쇄병동의 정신질환 장애인들과 열악한 노동 환경인 콜센터 등에서 부당한 처우를 받는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가장 먼저 코로나19에 집단 감염되었다. 감염자 역시 피해자인데도 그들에 대한 혐오와 비난이 끊이지 않았고, 성소수자들의 모임과 종교 모임에서 감염이 발생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사회가 위기를 함께 대응하기보다는 배제와 비난을 통한 책임 전가에 익숙함을 보여준 것이다. K-방역이라는 이름으로 정부의 방역이 효과적이라고 홍보했지만, 실제로는 자영업자들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의 희생이 이룬 효과에 불과했다. 우리 사회가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고 돌보는 사회가 아님을 보여준 것이다. 독일의 사회학자 벡(Ulrich Beck)이 ≪위험 사회≫(Risk Society, 1986)에서 위험과 손해는 사회 구성원들에게 고르게 분배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에게 과도하게 집중된다고 말했던 통찰이 우리 사회의 ‘민낯’으로 드러난 것이다. 2021년 5월 한국은행이 발간한 보고서 <코로나19가 가구소득 불평등에 미친 영향>에 따르면, 코로나19가 본격적으로 확산하기 시작한 2020년 2분기에 하위 10% 소득 대비 중위소득 배율은 6.4배(전년 동기 4.8배)까지 상승하였고, 동 배율은 3~4분기에도 전년 동기 대비 높은 수준을 보였다. 여기에서 정부 지원금의 영향을 빼고 보면, 2020년 소득 하위 20% 가구의 소득이 17.1% 감소하여 상위 20% 가구 감소율보다 11배나 높았다. 바우만(Zygmunt Bauman)이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Does The Richness Of The Few Benefit Us All?, 2013)에서 보여준 것처럼, 경제적 위기의 피해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가해지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가해지고, 오히려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부를 증진하는 기회가 되어 불평등이 심화된 것이다. 이런 ‘민낯’은 우리 사회에서 은폐되고 내재하여 있던 불평등과 각자도생(各自圖生)의 모습들이다. 단지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위기로 인해 드러났을 뿐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이전부터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한국 사회에 유행한 능력주의(meritocracy) 또는 실력주의 공정 담론이 이러한 ‘민낯’의 징후였다. 2017년과 2020년 인천국제공항 비정규직 일부의 정규직화 논란, 2017년 기간제 교사의 정규직화 논란, 2018년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논란, 2019년 조국 법무부 장관과 관련된 논란, 2020년 공공 의대 건립 논란 등의 다양한 사건들이 모두 실력주의 공정 개념과 관련되었다. 실력주의가 각자도생의 경쟁 사회를 지향하고 이것이 초래하는 차별과 경멸, 불평등 심화, 불안과 무기력 등의 폐단이 심각하다는 것은 많은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분석하고 지적한다. 그런데 이러한 분석에도 불구하고 젊은 세대가 지속적으로 실력주의 공정을 옹호한다면, 이것은 무지의 소산이 아니라 합리적 숙고의 결과일 수 있다는 생각도 해봐야 한다. 과거 어떤 세대보다도 열심히 노력해서 높은 스펙을 자랑하지만 자신의 부모 세대보다 가난할 수밖에 없는 불평등의 현실 앞에 선 젊은 세대에게 도박 같은 경쟁만이 현실 극복의 유일한 방안으로 보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가 직면한 경제적·사회적 불평등이라는 견고한 벽 앞에서, 어떻게 해볼 수 없으니 규칙만 지켜진다면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정글에서 각자도생하자는 절규가 실력주의 공정 옹호일 수 있다. 2021년 11월에 발표된 미국 퓨리서치센터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에 관한 조사 결과를 보면, 17개국의 평균응답에서는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가족이고 사회, 친구 등의 사회적 관계가 5위권 내에 들어가는 반면, 한국만이 1위가 물질적 재화인 돈(material well-being)이고 타자와의 관계는 뒷전이었다. 이 결과는 우리 사회가 사회 구성원들과의 연대나 협력, 상호 돌봄을 중시하는 사회가 아니라 각자도생의 사회임을 보여준다.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약육강식의 정글에서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은 돈이기 때문이다. 

    2021년 가을 전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던 넷플릭스의 드라마 <오징어 게임> 속 생사를 건 게임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우리 사회가 겹쳐 보인다. 드라마에서 오일남이 외친 “이러다가 다 죽어!”라는 외침이 우리 사회에 대한 경고로 들린다. 우리 사회는 왜 각자도생의 정글로 가고 있는가? 공멸을 막기 위해 우리가 주목해야 할 가치는 무엇일까? 각자도생의 사회, 치열한 경쟁 사회, 약육강식의 정글 사회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이러한 물음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대안 가치들은 정의, 평등, 자유, 연대 등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두터운 의미의 가치들은 왠지 멀게만 보인다. 이러한 가치들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좀 더 기초가 되고 토대가 되는 무엇이 필요해 보인다. 이러한 가치들이 확립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은 무엇일까? 필자는 이 글에서 이 모든 것의 토대가 바로 ‘공공성’(public or publicity)임을 보이고자 한다. 우리가 각자도생의 시대를 종결하고 연대와 협력의 시대로 나아가기 위한 새로운 상상력을 펼치려 한다면, 첫걸음은 공공성 회복으로부터 시작해야 함을 이 글에서 제시하고자 한다.  

    

* 공공성의 의미: 공공성이란 무엇인가?

    공공성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각자도생의 사회를 벗어나는 첫걸음이란 말인가? 모든 개념이 그렇듯이, 공공성도 고대에서 시작해 현대까지 오랜 기간의 사용과정에서 다양한 의미로 변천해 왔다. 이러한 개념사(史)를 톺아보는 것을 통해 배우는 것도 많겠지만 적은 분량의 글에서는 적절하지 않다. 이 글에서는 20세기 최고의 정치철학자이자 윤리학자인 롤즈(John Rawls)가 사용했던 중첩적 합의(overlapping consensus) 방법을 통해 그동안 사용되어온 의미들을 간략하게 정돈해 보고자 한다. 이 방식에 의하면,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공공성에는 상호 연결된 적어도 세 가지 의미인 공중 또는 인민, 공통의 좋음, 공적 소통이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공공성에는 이 개념을 형성하는 주체와 적용되는 객체인 공중 또는 인민 (people)의 의미가 담겨 있다. 공공성의 어원인 라틴어 ‘레스 퍼블리카’(res publica)는 ‘인민’을 뜻하는 ‘포플루스’(populus)와 어원이 같다. 현대 사회에서 공공성의 인민은 논의되는 사안의 관련자 모두를 의미한다. 공공성 논의에서 사안에 관련된 모두를 포함하지 않은 채 특정 집단이나 성원만으로 국한한다면, 그러한 공공성은 정당성을 의심받는다. 모두의 좋음을 정한다고 하면서 관련자를 배제한다면, 그렇게 정해진 것을 배제된 존재에게 적용하는 것이 정당한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난민 문제를 공공성 개념으로 접근한다고 하면서 당사자인 난민들을 논의에서 정당한 근거 없이 배제하는 것은 부당해 보인다. 이러한 현실의 모순은 아렌트(Hannah Arendt)의 ‘권리를 가질 권리’(the right to have rights) 개념에 잘 나타난다. 인간이라면 모두가 갖는다는 보편적 인권이 하위 개념인 개별 국가의 시민권에 의해서 보장된다는 인권의 역설은 공공성 개념에서 논의 주체에 대한 숙고가 필요함을 보여준다. 또한, 공공성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소통과 관련된 특정 능력이 없는 사람을 공공성 논의에서 제외한다면 그 또한 부당해 보인다. 과거 지식인들만이 ‘공통의 좋음’ 논의에 참여했던 것이 이러한 사례가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공공성은 관련자 모두를 포함한다는 의미를 기본적으로 갖고 있다. 

    둘째, 공공성에는 개념의 내용에 해당하는 ‘공통의 좋음’(common good)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사안과 관련된 이질적인 존재들이 논의를 통해 공공성을 형성한다고 할 때, 이들을 묶어내는 것은 공통의 관심사인 공통의 좋음이다. 이런 점에서 공통의 좋음은 특정한 내용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관련 주체들 사이의 소통 논의를 통해 구성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공적 논의 없이 공통의 좋음을 단순히 경제적 이익으로만 환원하는 우(愚)를 범하는 경우가 현실에서 종종 발견된다. 이명박 정부 시절의 의료 민영화 추진 발상, 2013년에 있었던 철도 민영화 추진과 공공의료 기관인 진주의료원 폐업 사태가 대표적이다. 이는 공적 논의 없이 공기업이 만년 적자라는 이유로 민영화를 통해 수익을 창출하고 더 좋은 서비스를 공급하겠다는 발상이라는 점에서, 공통의 좋음을 경제적 이익으로만 환원하여 왜곡한 사례이다. 공공성과 관련된 이상의 두 의미는 관련자 ‘모두’라는 의미와 깊은 연관이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구연상은 <공공성의 우리말 뜻매김>(2020)이라는 논문에서 ‘public’의 한국어 번역어를 ‘모두-성(性)’으로 제안한다. 

    셋째, 공공성의 개념에는 공개성 또는 공지성, 의사소통이라는 성격과 방법의 의미가 담겨 있다. 공공성의 어원인 독일어 Öffentlichkeit는 열림 또는 공개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런 성격으로 인해 공공성은 독일어의 동음이의어인 공론장(public sphere)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열려 있다’는 의미에서 다양한 가치들과 이질적인 것들이 공존하기에 대화하고 논의하는 과정이 필수적임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하버마스(Jürgen Habermas)가 잘 보여준 것처럼, 근대 이후의 공공성은 사회 구성원들 모두의 참여와 심의를 통해 구성된다는 특성이 있다. 물론 하버마스가 초기 논의에서 전제했던 이상적 토론이나 합리적 토론 능력과 같은 특정 조건은, 프레이저(Nancy Fraser)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잘 비판한 것처럼 특정 계급이나 집단에게만 유리하여 부당한 배제의 성격을 가질 수 있고 차이를 억압한다는 점에서 수정되고 재조정되어야 한다. 즉, 다양한 의사소통 방식, 예를 들면 논리적인 소통뿐만 아니라 절규나 감정 어린 고백과 같은 이성이 아닌 다양한 것도 소통의 방식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프레이저는 이런 다양한 담론의 형태를 포함하는 공론장을 대항적 공론장(counter publics)이나 대안적 공론장(alternative publics)으로 명명하는데, 이러한 시도는 다양한 관련자들을 정당하게 포함해야 한다는 공공성의 의미를 구현하려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공공성의 세 가지 의미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런 의미는 우리가 흔히 갖고 있는 공공성에 대한 오해를 해명해 준다. 먼저 공공성을 정부의 활동과 동일하게 이해하는 방식은 오해이다. 공공성의 의미에 따르면 공공성의 형성 주체는 정부가 아니라 사안과 관련된 인민, 즉 사회 구성원 모두이기 때문이다. 이념적으로 보자면, 정부는 사회 구성원들의 민의를 반영해야 하기에 정부가 시행하는 일이 공공성을 확보해야 한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정부가 사회 구성원들의 민의와 무관하게 자신들의 정파나 소수의 이익을 위해 일할 수 있기 때문에 정부가 하는 것이 그대로 공공성을 확보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정부 이외의 시민 사회나 집단에서도 공공성을 추구할 수 있다. 따라서 공립 병원, 국·공립 대학, 공기업은 공공성을 갖추고 있는 반면, 민간 병원, 사립대학, 사기업은 공공성을 갖추고 있지 않다고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우리는 최근에 공기업인 LH공사에서 벌어진 부동산 투기 사건을 기억한다. 따라서 정부가 실제로 하는 일들이 공공성을 확보하도록 사회 구성원들이 계속 채근해야 한다. 더욱이 인간의 삶은 정부에 의해서 모두 실현될 수 없는 복잡성과 다양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인간 삶의 중요한 양태인 공공성은 국가와 정부를 넘어 다양한 삶의 영역에서 실현되고 보장될 필요가 있다.  

    또 다른 오해는 공공성을 고정된 정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런 오해는 공공성을 공동체와 동일시하는 경향에서 비롯되곤 한다. 공동체는 일치(identity)에 토대를 두고 있지만, 공공성은 차이(difference)에 토대를 둔다는 점에서 다르다. 앞서 공공성의 의미에서 본 것처럼, 공공성은 다양하고 이질적인 존재들과 가치들이 소통의 과정을 통해 그 넓이와 깊이가 정해지는 동적인 것이다. 예를 들어, 과거에는 가정 폭력이나 아동 학대와 같은 가정에서의 일들을 사적 영역이라고 당연시했지만, 페미니즘과 다문화주의의 비판을 통해 더는 사적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최근 들어서는 사적 영역이었던 보육의 영역이나 요양의 영역도 공공성의 대상으로 고려되고 있다. 더욱이 최근에는 세계화로 인해 더 이상 개별 국가 중심주의적인 베스트팔렌 체제가 유효하지 않고 전(全)지구적 사고와 실천이 강조되고 있다. 왜냐하면, 기후 변화나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코로나19 팬데믹과 같은 문제는 한 사회와 국가만의 문제가 아닌 전 세계 공통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센(Amartya Sen)은 ≪정의의 아이디어≫(The Idea of Justice, 2007)에서 정의를 국내 정의와 전 지구적 정의로 구분하는 것 자체를 반대하고 모든 정의 문제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벤하비브(Seyla Benhabib)는 ≪타자의 권리≫(The Right of Others, 2000)에서 국가 중심주의와 세계시민주의 사이의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가치를 재구성하는 민주적인 반추(democratic iteration)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 공공성의 중요성: 왜 공공성이 중요한가?

    공공성은 사안과 관련된 구성원 모두(주체이자 객체)가 모두에게 좋은 것(내용)을 자유로운 대화를 통해 정하는 것(방법이나 성격)을 의미한다. 이런 공공성이 왜 중요할까? 공공성이 중요한 첫 번째 이유는, 공공성이 논의 사안의 정당성 확보 조건이기 때문이다. 탈(脫)형이상학의 다원주의 시대인 현대 사회에서 어떤 가치나 내용이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관련된 주체들 사이에서 논의가 필수적이다. 따라서 공공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가치는 정당화될 수 없다. 칸트(Immanuel Kant)는 ≪영구평화론≫(Zum ewigen Frieden. Ein philosophischer Entwurf, 1795)에서 모든 규범적 요구는 공개성의 형식을 결여한다면 어떠한 정의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공공성을 전제하지 않는 내용은 왜곡되고 오염되기 쉽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정의(justice)가 공공성 조건과 무관할 때, 정의는 폭력이 될 수 있다. 정부가 공공성을 전제해야 함에도 그러지 못했을 때, 예를 들어 특정 정파의 이익에서만 내용을 추구할 때 그것은 폭력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군부 독재 정부였던 전두환 정권의 ‘정의 사회 구현’이라는 모토 아래 얼마나 많은 비민주적인 폭력이 있었는지를 기억한다. 이런 점에서 롤즈는 ≪정의론≫(A Theory of Justice, 1971)에서 모두에게 알려져 있다는 공지성을 정의의 중요한 형식적 조건으로 삼고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사이토 준이치는 ≪민주적 공공성≫(公共性 Publicness, 2000)에서 공공성을 민주적 합당성(democratic legitimacy)과 민주적 통제(democratic control)라는 측면에서 민주주의와 관련된다고 분석한다. 공공성이 정당성을 확보해 준다는 의미는 공공성이 각자도생의 사회를 벗어나는 첫걸음이 되는 이유에 해당한다. 

    둘째, 공공성은 자유의 조건이자 실천을 위한 기제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공공성의 세 번째 의미에서 본 것처럼, 공공성은 다른 사회 구성원들과의 대화나 다양한 담론들을 포함한다. 이런 것은 인간의 자유로운 사고와 타자와의 소통이라는 자유를 의미한다. 복수의 이질성을 토대로 상호 대화하고 논쟁하면서 내용을 모색하는 공공성은 그 자체로 자유의 조건이 된다. 그런데 타자와의 담론을 통한 구성 방식은 그 내용을 주체가 수용하고 내면화하는 규범성(normativity)의 과정이 된다. 구성한 가치를 자신의 의무로 받아들이고 실천하려는 동기부여가 자유로운 소통의 과정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공공성은 자유로운 이성 행위의 조건이자 동시에 실천을 위한 동기부여의 기제가 된다. 미국의 민주주의를 심도 깊게 분석한 19세기의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은 ≪미국의 민주주의≫(Democracy in America, 1835)에서 민주주의를 합의나 만장일치보다 훨씬 시끌벅적한 담화의 과정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이를 형성하고 실천하는 민주주의적 덕성인 ‘마음의 습관’(habits of the heart)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민주주의적 덕성이 마음의 습관이 된다는 표현은 구성한 가치를 내면화하여 실천하려는 동기부여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공공성은 다양한 가치가 정당하게 구성되고 실현되는 토대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셋째, 공공성은 자아실현을 위해 필수적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인간 삶의 양태에 대한 논의는 다양하지만, 인간에게는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이 있다는 것에는 대부분이 수긍하는 것 같다. 인간에게는 다른 사람들에게 공개하지 않고 자신만이 향유하고 싶어 하는 모습과 관련된 사적인 영역이 있다. 이런 부분에 대한 논의가 프라이버시 논의이다. 다른 한편, 인간에게는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고 공유하는 영역 또한 있다. 이를 사회성이라고 부르든 정치성이라고 부르든,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부분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라는 것 자체가 타자를 전제한 것이고, 인간 존재가 부모의 결합과 관계된다는 점에서 사회성, 즉 공공성은 인간 삶의 필수적 영역이다. 따라서 공공성이 왜곡되거나 잘 구현되지 않는다면 인간 삶의 성취, 즉 자아실현은 요원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 1958)에서 공공성이 부재한 삶인 완전히 사적인 삶에 대해 인간의 본질적인 영역이 박탈되었다고 묘사한다. 이런 점에서 각자도생이 갖는 한계를 엿볼 수 있다. 2018년 한국리서치의 ‘외로움 경험’ 웹 조사에서 상시적 외로움을 느낀다고 응답한 비율이 20대가 40%, 30대가 29%, 40대가 24%, 50대가 20%, 60대가 17%를 보여, 젊은 세대일수록 외로움을 체감하는 비율이 높게 나타났다. 이러한 결과는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각자도생의 삶이 주는 무게를 홀로 버겁게 담당하는 젊은 세대의 삶이 왜곡되고 피폐함을 잘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공공성의 회복은 인간의 자아실현을 위해 중요하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공공성은 사회의 연대나 정의의 정당성과 실천을 위해, 그리고 자아실현을 위해 중요하다. 공공성이 우리 인간 삶의 중요한 양태 중 하나여서 자아실현을 위해 필요하고,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는 조건이며, 사안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토대라고 한다면, 공공성은 있으면 좋고 없어도 상관없는 선택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회복하고 가꿔야 할 대상이다. 이런 점에서 공공성의 회복은 우리 시대의 당면 과제이다. 각자도생의 정글에서 파괴적인 경쟁을 통해 공멸로 갈 것인지, 아니면 타자와의 연대와 유대 속에서 자아실현을 도모할 것인지, 그 갈림길에서 우리는 후자에 주목해야 한다. 각자도생의 한국 사회 민낯을 드러낸 코로나19는 역설적이게도 이런 각자도생의 사회에서도 그나마 서로를 연결하고 있었던 보이지 않던 존재들의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동안 사회의 관심 밖이었던 공공의료 기관인 보건소 직원들과 의료진들이 방역의 최전선에서 싸우고 있었으며, 택배 노동자들과 배달 노동자들이 고립된 삶을 유지하게 하는 끈이었음이 나타났다. 그리고 코로나19는 우리가 다른 사회들과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주었다. 이제 이러한 영역들 가운데 공공의 좋음을 위해 필요한 영역들이 무엇인지, 관련 주체들이 논의하면서 공공성 회복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 공공성과 대화하기: 어떻게 공공성을 회복할 것인가?

    공공성이 회복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가 각자도생과 고립에서 벗어나 사회 구성원인 타자와 소통하며 우리 모두의 좋음이 무엇인지를 모색하기 시작한다는 의미이다. 공공성이 먼저 회복되어야 연대, 돌봄, 정의 등의 구체적이고 두터운 의미의 가치가 싹을 틔울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공공성 회복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공공성 회복과 복원을 위해 우리가 갖춰야 할 것은 무엇인가? 필자는 ‘공공성과 대화하기’를 대안으로 제안한다. 

    먼저 시민이 공공성의 주체로서의 의식을 갖추고 공공성과의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사회적·경제적 불평등 해소가 불가능하다는 절망과 좌절감을 내려놓고, 용기를 내어 공공성이 무엇인지를 되묻고 그 가치를 다시 음미하면서 다른 사회 구성원들과의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비록, 지금 상황은 개선될 것 같지 않고 불평등의 장벽은 너무 높아 보이지만, 우리에겐 가족과 이웃,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생각하고 용기를 내야 한다. 그리고 나뿐만 아니라 타자도 나와 동일한 외로움과 고립감에 놓여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 계속해서 이렇게 고립할 때, 공멸할 수밖에 없음을 인지해야 한다. 우리의 삶을 위해,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어렵겠지만 타자와 공공성에 대한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이 대화는 1회성의 실천이 아니라 지속해서 계속되어야 한다. 앞에서 보았던 것처럼, 공공성은 우리가 추구하는 연대, 정의, 평등 등의 가치가 성립하기 위한 조건이자 토대이다. 공공성을 통해 정당성과 실천성을 담보하지 못하면, 추구하는 가치가 왜곡되고 타락한다. 촛불집회를 통해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을 탄핵했고 새로운 정부를 탄생시켰을 때, 시민들은 우리의 일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정부가 촛불 정신을 잘 성취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기대처럼 잘되지 않을 때, 국회의원 숫자가 적어서 그랬다고 생각해 180석이라는 압도적인 숫자를 뽑아 주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는가? 각자의 판단이 다르겠지만, 공공성 회복에 기여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공공성은 정부가 위임받아서 실천하지만, 결국 그 주체는 사회 구성원들인 시민인 것이다. 따라서 대리인인 정치인에게 위탁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비판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우리의 삶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지만 그동안 무관심으로 인해 보이지 않았던 영역들과 존재들에 대한 공공성 가치 부여를 할 필요가 있다. 

    공공성과의 대화가 그다지 영향력 있는 대안으로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공공성과의 대화가 민주주의적 덕성을 함양하도록 돕는다는 점에서 그 파급력은 작지 않다. 토크빌이 잘 지적한 것처럼, 민주주의는 제도가 아니라 마음의 습관이다. 토크빌은 미국에서 민주주의 유지에 시민들의 생활 태도와 관습이 가장 크게 기여했다고 분석한다. 더 나아가 토크빌은 이러한 민주주의적 덕성이 약화되면 민주주의의 발전에 저해되는 민주주의적 독재가 야기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민주주의적 덕성이 없으면 개인주의는 처음에는 공공생활의 덕성을 침식하다가 다른 모든 것을 파괴한다. 왜냐하면 이기주의는 각 개인을 고립시키고 모든 덕성의 씨앗을 마르게 하기 때문이다. 토크빌은 이러한 위험을 막기 위해, 즉 민주주의에 숨어 있는 필연적인 개인주의가 이기주의로 전락하지 않고 평등을 지향하게 하기 위해 민주주의적 덕성을 함양하고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공성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다른 사회 구성원과 대화하는 것은 민주주의적 덕성인 연대성과 상호 존중을 배우고 실천하는 계기를 마련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공성 아래 돌봄과 정의 등의 두터운 의미의 가치가 싹을 틔우고 자라기 시작할 것이다. 따라서 공공성과의 대화는 용기를 낸 첫걸음이어서 사소해 보이지만 힘찬 도약의 계기가 될 것이다. 

    공공성과 대화하는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두 가지만 언급하면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첫째는 선거를 통해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는 후보, 사회의 공공성을 회복할 수 있는 후보를 선출하고 끊임없이 감시하면서 공공성이 성장하도록 가꾸라는 것이다. 둘째는 윤리적 소비를 통해 환경(Environment), 사회적 가치(Social value), 그리고 지배구조(Governance)를 기업의 목적으로 두어야 한다는 ESG 경영 논의가 확산되게 하라는 것이다. 최근 들어, 주주 이익 극대화라는 전통적인 의미의 기업 목적이 실상은 논리적 허구이며 신화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문제라는 주장이 경영학 주류에서 제기되고 있다. 경제적 불평등의 원흉으로 보였던 기업이 환경, 사회적 가치, 지배구조를 중시해야 한다는 ESG 경영 논의가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다. 비록 기업이 윤리적 소비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자신의 이미지를 개선하려는 ‘윤리 세탁’(ethics washing)으로 이런 논의를 시작했을지 몰라도, 우리의 끊임없는 ‘공공성과의 대화하기’는 이 논의를 공공성 확장으로 인도할 것이다. 

    지금은, 공멸을 향해 나아가는 각자도생의 시대를 종결하고 연대와 협력의 시대로 나아가기 위한 첫걸음, 공공성과의 대화를 시작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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