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호/2022.12][전문공개/P-word특집]빈곤의 다차원성,사회적 배제를 넘어 포용으로

평화저널 플랜P
2022-12-20


                                                                                                                    신명호 <사회투자지원재단 사회적경제연구소 소장>


1.  한국에는 ‘가난’이 없다는 사람들 

가난 혹은 빈곤의 사전적 정의는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것을 갖지 못해 몸과 마음이 괴로운 상태’이다. 이것은 청빈(淸貧)과 달라서, 자신이 원해서 그런 상태에 이른 것이 아니니 괴로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단순한 빈곤의 정의를 온갖 사람들의 상태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고자 하는 순간, 상황이 복잡해진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최소한이란 얼마만큼을 가리키는지에 대한 생각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우선 ‘먹을 것’만 하더라도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먹는가가 각 사회의 관습과 문화에 따라 달리 결정된다. 그래서 유럽연합(EU)은 ‘자기가 사는 사회에서 용인되는 생활 수준을 누릴 수 없을 만큼 소득과 자원이 부족한 경우’를 빈곤 상태로 정의한다. 자기가 속한 사회에서 용인되는 무언가를 결여하고 있을 때, 그는 보통 사람들이 누리는 일반적인 삶으로부터 배제되거나 무시당하기 십상이다. 

흔히 경제학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애덤 스미스(A. Smith)도 이런 상대적 박탈의 문제를 언급한 바 있다. “필수품이라는 말에서 내가 이해하는 것은, 생명의 유지에 없어서는 안 되는 상품뿐만 아니라, 그 나라의 습관이 어떠하든, 그것이 없으면 최하층 사람들도 견실한 사람으로서의 체면을 잃게 되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이를테면 아마*셔츠는 엄밀하게 말해서 생활필수품은 아니다. … 그러나 현대에는 유럽의 대부분에서 견실한 날품팔이 노동자라면 아마셔츠를 입지 않고 남 앞에 나서는 것을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그것이 없다는 것은, 극도의 나쁜 행위를 하지 않는 한 도저히 빠질 리가 없을 것으로 추측되는, 낯이 뜨거울 정도의 가난을 나타내는 것으로 상정될 것이다.”*

* 1) 아마(亞麻)과의 한해살이 풀로서 껍질의 섬유로 리넨(linen) 따위의 피륙을 짠다. / * 2) 애덤 스미스, 《국부론》 (유인호 옮김), 동서문화사, 2014(2판 10쇄), 911쪽.

스미스가 살던 18세기 영국에서는 가난한 노동자라도 아마셔츠를 입지 않으면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 했다. 사람이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인정받고 관계 맺으며 행동하는 데 필요한 삶의 조건을 갖추지 못했을 때 상대적 박탈이 일어나며, 이것이 가난이다. 

이처럼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요소가 사회마다 제각기 다르다는 것, 그리고 박탈이 일어나고 있는지 여부는 다른 사회구성원들과의 관계적 거리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 이 두 가지 사실로 인해서 빈곤의 정의는 상대성을 띠게 된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가난한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은 오직 같은 시대, 같은 사회에 사는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 원칙을 벗어나면 서로 비교할 수 없는 것을 비교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타인을 평가하는 데 그리 신중하지 않다.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믿고 말한다. 한때 노동해방을 꿈꾸었던 한 혁명가 시인이 우리나라의 가난을 부정할 때도 그랬다. 아프리카와 중남미의 가난한 주민을 찍은 사진 전시회를 열면서 그는 말했다. “이제 우리 사회에 가난한 사람은 없다. 부자가 되지 못한 사람만 있을 뿐이다. … 중국, 인도 등의 모든 사람이 우리의 최하위 10%처럼 산다면 지구가 열 개라도 모자랄 것이다. 이만하면 넉넉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아프리카의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을 기준 삼아 한국에는 더 이상 가난이 없다고 단언했다. 또 과거를 기준으로 현재의 가난을 부정하는 이들도 흔하다. 절대빈곤 시대를 경험한 노인들은 ‘내가 어릴 때(1950-60년대)는 하루 한 끼 먹기도 힘들었는데 먹을 게 지천인 요즘 세상에 무슨 가난이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 주위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이들은 인도가 아닌 한국에서, 1960년이 아닌 2022년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눈앞의 문제를 부정하면 그 해결의 문은 열리지 않는다. 빈곤 현상에 대한 부정은 곧 무관심을 의미하고, 이러한 태도는 빈곤 문제 해결의 진전을 어렵게 한다.


2. 빈곤의 다차원성과 사회적 배제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인간의 필요는 물질적이면서 동시에 심리사회적(psychosocial)이다.* 어떤 생활자원의 결핍은 사회적 참여를 가로막는다. 과거보다 물질적으로 더 풍요로워진 요즘에는 이 같은 상대적 박탈의 위험이 더 크다. 오늘날의 소비사회에서는 청소년들 사이에 유행하는 유명 브랜드 제품을 갖지 못했다는 사실이 낙인이 되고 빈곤의 표식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빈곤의 개념은 물질적 결핍뿐 아니라, 그로 인해 ‘존중받지 못함’, ‘인권 및 시민권을 부정당함’, ‘낙인감과 수치심’ 등을 의미하는 관계적·상징적 측면을 내포하고 있다. 또 빈곤은 단순히 화폐소득의 부족만이 아니라, 열악하고 불안정한 주거생활, 건강을 잃어버린 신체나 정신,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의 상실, 사회적 관계의 단절과 고립, 정치적 발언권 없음, 문화적 소외 등등을 뜻한다. 이렇듯 빈곤은 다차원적이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빈곤(poverty)’이란 단어가 충분히 드러내지 못하는 박탈의 본질을 보완하기 위해서 오래전부터 ‘사회적 배제(social exclusion)’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에 유럽연합(EU)의 집행부인 유럽위원회(European Commission)는 ‘사회적 배제’를 공식 용어로 채택하게 되는데, 유럽연합의 빈곤 해설서는 ‘사회적 배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사회적 배제는 사람을 사회의 주변부로 몰아가는 과정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하는 개념이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자원과 기회에 접근하기 어렵고 평범한 사회적·문화적 삶에 참여할 수 없어 소외되고 무력하고 차별받는다고 느끼게 된다.”*

*3) 루스 리스터(2021), 『풍요의 시대, 무엇이 가난인가』, 갈라파고스, 47쪽.  /  *4) European Anti-Poverty Network(EAPN)(2009), Poverty and Inequality in the EU, EAPN Explainer #1,  p. 3. https://www.eapn.eu/images/docs/poverty%20explainer_web_en.pdf

여기서 ‘누가 누구를 사회의 주변부로 몰아간다는 것인가?’, 즉 ‘배제의 주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적 배제의 개념에서 취약한 대중을 주변부로 몰아가는 힘은 인격화된 특정의 사람이나 기관이 아니라 일체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구조와 제도를 가리킨다. 이는 자원과 기회에 접근할 수 없게 된, 다시 말해서 사회적으로 배제된 상태의 원인이나 책임이 개인에게 있지 않다는 의미이다.

또한 사회적 배제 개념은 주변부로 밀려난 결과보다는 밀려나는 과정, 즉 구조의 힘이 작동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필연적으로 주변화된 사람들을 다시 사회의 중심부로 돌아오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빈곤 문제를 해결하려는 각국의 정부가 사회적 배제의 반대 개념으로 사회적 포용(social inclusion), 혹은 사회 통합(social integration) 등을 정책 목표로 내세우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다. 


3. 가난한 사람들은 왜 가난한가?


이에 관해서는 아주 오래전부터 전해져오고 있는 미신이 있다. 본인이 ‘가난을 벗어나고자 충분히 노력하지 않아서’라는 당사자 책임론이다.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감정의 역사는 중세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지배층의 눈에,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게으르고 노동 의지가 약하며 절제할 줄 모르는, 나쁜 습성을 지닌 집단이었다.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도는 부랑인이나 걸인은, 그들이 보기에는 잠재적 범죄자인 동시에 전염병 보균자였다. 이처럼 빈민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담론은 근대까지 어찌나 도도하게 흘러왔던지, 《빈곤의 역사》를 쓴 게레멕(B. Geremek)은 이런 현상을 당시 사람들의 ‘집단 심성’이라고 불렀을 정도이다. 

소설가 조지 오웰(G. Orwell)도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세상의 편견을 이렇게 꼬집었다. “부랑인은 ‘건장한 걸인’이고, ‘염치없는 사회적 기생충’이라고 여기는 관념은 근거가 전혀 없지는 않지만 그러한 사례는 불과 몇 퍼센트에게만 적용된다.” 그런데도 나태하고 불성실하며 부도덕하다고 비난받아 마땅한 단 몇 퍼센트의 사례는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 대부분의 일반적인 특징으로 둔갑되었다. 예외적 소수가 전체를 대표하는 역전 현상에 무슨 근거가 있을 리 없었다. 이런 일반화의 오류야말로 인간들이 부지불식간에 흔히 범하는 잘못된 사고방식의 하나일 따름이다.

앞서 사회적 배제 개념에서는 사람들이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나는 원인, 즉 빈곤해지는 원인을 전체 사회의 불평등한 구조와 제도에서 찾는다고 했거니와, 이러한 구조적·제도적 관점의 정반대편에 있는 것이 바로 개인에게서 원인을 찾는 개인 책임론이다. 개인은 감각을 통해 인지할 수 있는 구체적 실체인 반면, 사회구조란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 개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가 본 아무개의 어떤 행동이 그를 가난에 빠뜨렸다’는 식으로 말하기를 좋아한다. 빈곤화라는 현상의 원인을 사회구조 혹은 경제체제라는 어렵고 추상적인 지적 건조물에서 찾기보다는, 자신이 직접 경험한 구체적 사건과 인물들에서 찾는 편이 확신의 감정을 훨씬 높여주기 때문이다. 본인이 직접 경험한 사례의 수가 적다는 사실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개인의 잘못이라고 여겨질 만한 사례들은 열심히 기억하고 그렇게 설명되지 않는 사례는 철저히 무시함으로써 자신의 믿음을 굳건히 지켜가면 그뿐이다.

사람들은 빈민의 고통보다 그들의 불법 행위를 더 잘 인식한다. 빈민은 다른 사람들처럼 때론 기아와 추위로 죽지만, 부자들은 그들이 구걸하고 훔치고 약탈하는 것만을 본다. 이처럼 일반화의 오류는 확증편향의 오류를 만나서 더욱더 강고해지는 탓에, 가난의 원인을 당사자의 나태함이나 의지박약 등으로 돌리는 개인 책임 담론은 오늘날에도 빈곤을 이슈로 하는 장이라면—사적 대화든 정책 토론회든—어느 곳에서나 예외 없이 발화된다.

이렇게 가난한 사람들은 타자화(他者化)된다. 중심부의 세력 집단이 자기의 정체성을 ‘정상적이고 좋은 것’으로 정의하고, 다른 집단에게는 부정적인 속성을 부여함으로써 자신들을 다른 집단과 구별되는 존재로 규정짓는 방식을 ‘타자화’(othering)라고 한다면, 빈민이 아닌 계층과 빈민들 사이의 관계를 이 단어보다 더 적확하게 표현하는 말은 없을 것이다. 타자화는 차별과 선 긋기를 병행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이 선은 중립적이지 않다. 빈민을 도덕적 타락의 근원, 두려워할 만한 위협, ‘자격 없는’ 경제적 짐 덩어리, 연민의 대상, 이국적인 존재, 나아가 인간 이하의 존재로까지 깎아내리는 부정적인 가치 판단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 5) E. M. Power, 2005; 루스 리스터, 2021: 119에서 재인용.


4. 빈곤의 해법을 바라보는 관점 


빈곤이 극도의 결핍이 주는 고통을 의미한다면, 불평등은 정반대 쪽의 과도한 풍요와 빈곤 사이의 격차가 빚어낸 불공정함이다. 그래서 빈곤과 불평등은 언제나 동전의 양면처럼 짝을 이룬다. 빈곤이 상대적 박탈의 개념을 포함한다고 했을 때, 상대적 박탈은 오직 불평등이 있음으로 해서 성립한다. 빈곤이 만연한 사회일수록 빈부격차, 불평등의 정도가 심한 경향이 있다. 우리나라는 미국, 영국 등과 함께 OECD 회원국 가운데, 1인당 국민소득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빈곤 인구의 비율, 즉 빈곤율이 가장 높고 불평등이 심한(지니계수가 높은) 나라 군에 속한다.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들은 어떻게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개인 책임의 담론은 (태만과 무절제 등의) 자기 파괴적 행동이 우리가 빈곤의 늪에 빠지게 되는 보편적 이유라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빈곤을 벗어나는 비결에 관해서도, 온갖 역경에도 불구하고 빈곤 탈출에 성공한 개인들을 높이 치켜든다. ‘불우한 환경에서 각고의 노력 끝에 입신양명에 성공한’ 예외적 인물의 이야기는 또 한 차례 가난한 사람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희망의 처방으로 둔갑한다. 여전히 한 편에서는 빈민의 삶을 틀 짓는 불평등한 사회구조가 ‘평균적으로’ 빈곤을 재생산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런 진단 하에서는 ‘환경 탓하지 말고 오직 가열차게 노력할 것’, ‘능력을 길러서 공정한 경쟁에서 승리할 것’을 주문하는 목소리만 정당화된다. 

개인의 능력과 공정한 경쟁을 강조하는 능력주의 담론은 흔히 시험 성적으로 나타나는 소위 ‘능력’이 순수한 진공상태에서 어떤 것의 영향도 받지 않고 오직 개인의 노력으로 성취한 결과인 양 호도한다. 오늘날 잘사는 집 아이의 학업 성취도가 어려운 가정 아이들의 그것에 비해서 높은 경향이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잘사는 가정 자녀의 학업성적에는 본인의 노력 외에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라는 요인이 분명 작용한 것이고, 그 아이가 잘사는 부모 밑에 태어난 것은 결코 본인의 성취가 아니라 그냥 운(運)이 좋았던 것뿐이지 않은가. 학교는 결코 공정한 경쟁의 장이 아니다. 

능력주의의 신봉자들은 공정한 절차를 거쳤다는 이유로 일체의 불평등과 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한다. 다시 말해서, 경쟁이 공정하게만 이루어지면 그 결과가 아무리 불평등하고 차별적이어도 상관없다고 여긴다. 하지만 완벽하게 공정한 경쟁이 일어날 수 있는 조건이란 땅 위에 무중력 상태를 만드는 것처럼 불가능하다. 오직 개인의 노력과 능력의 양을 완벽하게 측정했다고 주장하는 각종 시험들이 실은 ‘이미 기울어져 있는 운동장’의 오차를 무시한, 신뢰할 수 없는 측정 도구인 것이다. 불평등과 차별을 정당화하는 능력주의 이념은 결코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 수 없다. 


5. 각자도생의 전략은 틀렸다  


각자도생의 신앙, 그리고 가열찬 경쟁은 지난 20세기부터 세계 경제를 지배해오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가르침이다. 이것은 불평등이 깊어지고 불확실성이 높아지는 이 세상에서 내가 살아남는 길은, 오직 공정한 규칙 아래서 치열하게 경쟁하는 것뿐이라는 믿음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아픔을 연민하거나 그에 동참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의 사치로 치부된다. 그리하여 우리 각자는 점차 외로워지고 고립된다. 경쟁에서의 승리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주변을 늘 경계하고, 가상의 적을 의심하며, 스스로 외로움의 울타리를 친다. 고통받는 사람의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런 공감의 자세가 혹시 나를 위험과 손해에 빠뜨리지 않을지 미리 걱정한다. 이러한 자기 고립의 심리학은 때로 자기애(自己愛)를 극도로 고갈시켜 마침내 타인을 경멸하고 모욕함으로써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공격적인 모습을 띠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처럼 철저히 이기적인 개인주의는 자존의 인성은 희생한다 치더라도, 경제적 성공에서는 현명한 전략일까? 내가 빈곤과 불평등의 늪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확률을 실제로 높여주는 방안일까? ‘의자놀이(musical chairs)’라는 게임에서 항상 의자의 수는 사람 수보다 적기 때문에 몸놀림이 굼뜨거나, 판단력이 늦거나, 보행에 문제가 있거나, 남을 밀쳐낼 만큼 악착같지 못하거나, 혹은 아주 운이 나쁜 사람은 실패하게 되어 있다. 누군가는 실패하게 되어 있는 구조가 거기에 존재한다. 실패자를 생산하는 구조의 문제를 따져 묻지 않고 ‘그게 나만 아니면 된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실제로 나의 실패 가능성을 단 한치도 낮춰주지 못한다. 

오늘날과 같은 고립과 불평등의 시대에 각자도생의 전략은 실리의 측면에서도 그다지 권장할 만하지 않다. 오히려 단절된 관계를 다시 잇고 무너져가는 공동체를 되살리려는 노력 속에서 희망이 보인다. 그리고 덧붙이는 사족 하나. 이처럼 힘든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과연 자존의 인성은 포기해도 좋은 것인가? 아니,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굳건히 지키고 세워야 할 최후의 보루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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