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호/ 2023.06]12호 [인터뷰/인물] 양극화 사회 속 다리 잇기, 신한열 수사를 만나다

평화저널 플랜P
2023-09-08


양극화 사회 속 다리 잇기, 신한열 수사를 만나다

 

지금의 한국 사회를 대변하는 가장 적절한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양극화’일 것이다. 정치, 경제, 사회 전 영역에서 사람들 사이에는 짙고 날카로운 경계선들이 도사리고 있다. 여기저기 긁히고 베인 상처들이 곳곳에 가득하지만, 작은 밴드 하나로 상처만 가리는 미봉책이 난무한다. 우리 사회 이대로 괜찮은 걸까.

위기의 시대마다 길을 비추는 이는 언제나 권력을 손에 쥔 자가 아니라 세속에 물들지 않은 현자들이다. 작은 등불을 들고, 우리 사회 곳곳을 유심히 살피는 이, 가식과 위선을 들추고 은폐된 것을 폭로하는 이, 끊어지고 허물어진 것을 하나씩 연결하고 쌓아가는 이. 바로 그이가 오늘 우리가 만나려는 떼제 공동체의 신한열 수사다. 프랑스 국적의 한국인, 평신도 수도자라는 그의 독특한 정체성은 그가 우리 사회를 깊고도 낯설게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원천이 된다. 오늘 그의 낯선 시선이 머무는 곳은 어딜까. 우리가 보지 못하는 우리를 만나기 위해 잠시 그의 낯선 시선을 따라가 본다.

 

1980년대 후반, 우리나라에서는 생소했던 수도 공동체 ‘떼제(Taizé)’가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는데요. 수사님께서 함께하시는 떼제 공동체는 어떤 곳인가요?

 

‘떼제’는 프랑스 동부에 있는 부르고뉴 지방의 작은 마을 이름입니다. 그 마을에 있는 초교파 국제 수도 공동체가 바로 ‘떼제 공동체’(이하 떼제)입니다. 개신교 여러 교파 출신과 가톨릭 형제들이 독신과 영적 물적 재산의 공유를 서약하고 삽니다. 전 세계 모든 대륙 30여 개국에서 모인 90여 명의 수사들이 공동체에 속해 있습니다. 1940년에 시작했으니, 이제 80년이 넘었죠. 처음엔 스위스 개혁교회 출신 로제 수사(Brother Roger)가 2차대전 중에 혼자 살면서 유대인들을 비롯한 망명자들을 숨겨주었어요. 전쟁 뒤에는 소수의 형제들이 합류하여 떼제 근처의 독일군 포로수용소를 찾아가고, 전쟁고아를 떼제에 맞이해서 돌봤어요. 그런데, 아무것도 없는 시골 마을인 이곳에 1950년대 후반부터 많은 청년이 찾아오기 시작했어요. 여러 가지 사회적인 배경이 있겠습니다만, 특별히 1960년대 말 유럽 사회에는 젊은이들이 모든 권위를 거부하는 68혁명이 일어났어요. 정부와 교회 그리고 아버지의 가부장적 권위를 거부하고 반대하는 것이었지요. 많은 젊은이가 교회를 등지고 떠나갈 때, 떼제는 오히려 청년들의 이야기를 열린 귀로 듣겠다며 ‘여기로 오라’고 초대했어요. 당시만 하더라도 기성세대들이 젊은이들을 가르치려고만 했는데 말이죠. 물론 그건 큰 모험이기도 했는데 그때 이후로 점점 더 많은 청년이 떼제로 왔어요. 프랑스 시골 마을, 수도 공동체, 젊은이들의 모임, 이 세 가지가 하나로 연결된 것이죠.

연중 수만 명이 떼제를 찾아옵니다. 청년 모임을 일주일 단위로 연중 계속하는 거죠. 유럽 사회와 교회가 변화되는 시기에 떼제는 많이 다르고, 새롭게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떼제가 일부러 새로운 걸 추구한 것은 아니에요. 오히려 늘 성경 중심에다 기도하고 묵상하고 노래하고, 또 침묵을 중시하는 점에서는 오히려 전통적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러면서도 시대의 징표와 요청에 민감하고 깨어 있으려 합니다. 그래서 현대의 많은 이슈와 과제들이 여기로 모이는 것이죠. 청년들은 저마다 자신의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찾아옵니다. 떼제는 얼핏 보면 대립적으로 보이는 내적 생활과 사회적인 참여를 양분화하거나 대립시키지 않았어요. 영어로 하면 ‘and’로 연결하는 것이죠.

일반적으로 수도원 하면 기도만 하고 세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곳으로 생각하기 쉽지요. 떼제는 시골의 아주 작은 마을에 있지만, 초창기부터 항상 전쟁의 고통과 아픔, 난민들을 생각했고, 그것은 지금까지 이어집니다. 수도 생활에서도 개인 기도와 공동기도, 노동과 손님맞이에 조화를 유지하려 애씁니다. 수사들은 기도만 한 것이 아니라 정의를 추구하는 젊은이들에게 귀 기울이고, 그들의 이야기를 사심 없이 들어주려고 했죠. 68혁명 세대의 젊은이들이 인간이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투쟁을 외칠 때, 그 투쟁의 힘을 자기 내면에서 발견하도록 ‘투쟁과 관상(깊은 기도)’을 연결해서 얘기했어요. 그 모토가 70년대까지 쭉 이어졌고, 80년대 이후로는 그것이 ‘내적 생활과 인류의 연대’라는 표현으로 바뀌었죠. 여기에도 항상 ‘and’로 두 가지 가치를 연결하여 젊은이들이 모이는 만남의 주제가 되게 하였죠.

떼제에는 사실 시설도 많지 않고, 아주 소박합니다. 단순하고 소박한 가운데 전 세계 젊은이들이 만나서 더 넓은 시야를 가지게 되고, 서로 격려하면서 힘을 얻어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떼제에는 많은 젊은이가 모이지만, 어떤 운동 단체나 멤버십 같은 것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우리 수도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손님인 것이죠. 순례자로 왔다가 다시 돌아가는 겁니다. 각자 자기가 사는 지역, 자기가 속한 교회에서 ‘화해한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격려하고, 또 그것을 위해서 떼제만이 아니고 다른 나라에서도 청년 모임을 이어갑니다. 우리 수사들 가운데 일부는 현재 세네갈, 방글라데시, 브라질, 쿠바의 가난한 지역에도 작은 공동체를 이루어 살고 있습니다. 한국의 경우에는 분단국가라는 점에서 1979년 말~ 80년대 초반부터 떼제 수사들이 살고 있고요.


떼제가 추구하는 가치들이나 모임의 성격은 처음부터 의도한 것이었나요? 아니면 전 세계 젊은이들이 찾아오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기 시작한 것인가요?

 

공동체가 생길 때는 전쟁 중이라 그리스도교의 일치와 인류의 화해를 생각하면서 시작됐어요. 유럽의 나라들은 대부분 그리스도교 문화권의 나라들인데, 그리스도교 나라들이 서로를 죽이는 전쟁을 벌인 것에 대한 반성이 있었고, 특히 가장 잔혹한 전쟁이 1차, 2차 세계대전이었으니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화해와 일치를 할 수 있어야 평화가 가능하겠다는 직관을 설립자인 로제 수가가 가지게 된 것이죠. 그러면서 아주 빠르게 국제 공동체로 성장했죠.
제게도 가장 크게 와닿았던 것이 떼제의 ‘국제성’과 ‘개방성’이었습니다. 유럽에서 그리스도교의 본류라고 할 수 유럽의 교회들을 경험하게 됐고, 다른 나라와 문화, 그중에서도 개인적으로는 라틴아메리카를 발견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자원봉사를 하면서 라틴아메리카 청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라틴아메리카 나라들, 특히 칠레는 우리나라처럼 군사 독재를 경험하고 민주화의 기로에 있었기 때문에 칠레 친구들과 얘기를 나누며 친해졌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그 청년들이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모습들을 보면서 라틴아메리카에서의 삶을 꿈꾸기도 했습니다. 그런 발견들이 저에게는 새로운 시야를 갖게 해주었어요. 책을 통해 배운 것이 아니라 사람을 직접 만나 소통하면서 배운 것들입니다. 더불어 유럽에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것도 봤고, 북아일랜드에 평화가 오는 과정도 지켜봤어요. 한마디로 역사의 현장에 있으면서 그런 변화를 더 가깝게 느낄 수 있었죠. 저는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환상을 일찍이 동유럽 친구들을 통해서 버릴 수 있었고, 자유라는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지도 깨달았어요.

그리고 개방성과 관련해서 제가 배운 것은 남녀노소에 상관없이 서로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거예요. 한국에서는 젊은이들조차 나이와 선후배를 따지는 문화가 강한데 저는 그게 좀 싫었어요. 그건 우정을 제한하고 사람들 사이에 어떤 장벽을 세우는 것이라고 봐요. 복음 정신은 그런 벽을 넘어 모두가 친구가 될 수 있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 중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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