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호/2021.12]6호/2021.12 [전문공개/P-word특집] 분노 유발자가 된 언론에 대한 소고

플랜P
2021-12-22

                                                             

                                                                                                                                                 문상석(강원대학교 사회학과 조교수)


가. 언론이 만드는 역기능 


언제부턴가 신문이나 방송을 보면서 자극적인 제목을 단 뉴스들에 화가 나기 시작했다. 더욱이 그러한 자극적인 제목의 뉴스를 따라 들어가다 보면, 이미 다 알고 있어 새로울 것이 없는 내용들이 많았다. 그런 기사들을 접하면서 그것을 전달하는 매체, 그리고 그것을 작성하고 방향을 설정해 주는 소위 ‘데스크’에 대해서도 반감이 일어났다. 왜냐하면 교묘하게 글 뒤에 숨어서 사람들의 인식의 방향을 좌지우지하려는 의도가 있는 글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소위 신문 재벌과 재벌 신문 그리고 경제지를 표방하는 이들이 자신들이 표적으로 삼는 대상에 대해 가혹하고 교묘한 비난을 가할 때,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그들이 원하는 논리에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했다. 사실 언론이 고발하는 다양한 문제들을 사회구조와 연결해 보면 분노가 아니라 사회개혁에 초점을 맞추게 되지만, 언론이 이끄는 대로 하나의 사건에 매몰되면 사회개혁의 필요성은 잊히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어느덧 분노만 쌓이게 된다. 그리고 그런 언론이 만들어낸 분노는 어떤 실재하는 것에 대한 분노라기보다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쌓여 있는 분노를 그저 특정한 대상을 향하게 만드는 수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언론이란 그만큼 무서운 것이다. 노무현 정부 시기에 ‘모든 것이 노무현 탓’이라는 풍조가 있었다. 자신이 길을 걷다가 넘어져도 노무현 탓이고, 추수가 덜 되거나 예기치 않은 재난을 당해도 노무현 탓이라고 외치던 이들이 있었다. 시간이 좀 지난 이야기지만 ‘부먹충’과 ‘찍먹충’이란 말도 있었다. 탕수육을 먹을 때 소스를 고기에 부어 먹는 집단은 ‘부먹충’, 고기를 소스에 찍어 먹는 집단은 ‘찍먹충’이라 불렸다. 그런데 이 표현을 빌자면 뭘 먹어도 탕수육을 먹는 사람은 결국 벌레가 되어 제거의 대상이 된다. 좋은 벌레는 없다. 해충은 제거되어야만 하는 존재일 뿐이다. 이것을 정치 현실에 적용한 예가 우리 사회에 만연하다. 중국의 지도자가 일본을 방문할 때, 한국을 경유해서 가면 독립 외교를 하지 못한 한국 외교의 무능을 비난하고, 만일 한국을 건너뛰면 한국 ‘패싱’이라며 비난을 쏟아낸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대통령이 백신을 맞지 않고 있으면 ‘국민이 실험실의 쥐인가’라며 비난하고, 대통령이 먼저 백신을 맞으면 ‘대통령이기 때문에 먼저 맞는다’라고 공정의 문제를 들이대며 비난한다. 도무지 비판의 기준이란 것도 없이 며칠 전에 자신들이 비난했던 사항을 실행하면 이번엔 반대의 근거를 들어 비난을 지속한다. 하라고 해서 하면 ‘하란다고 하냐?’라는 비난이 더해지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대중들은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 채 언론이 명령하는 대로 분노하고, 특정한 대상을 향해 자신의 분노를 표출한다. 언론은 이렇게 사람들의 분노를 유발하지만, 절대 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언론이 제공하는 정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그에 따라 분노를 유발하는 사회는, 한 마디로 언론에 의해서 여론이 조작되는 위험 사회이다. 더욱이 언론이 노출하는 정보에 기반해 분노하는 사회가 더욱 위험한 까닭은, 왜곡된 정보들이 특정한 집단에 유리하게 작동하도록 만들어졌다는 데 있다. 언론의 주장을 시민들이 그대로 수용하게 되면 왜곡된 이미지를 통해 이익을 얻으려는 집단들이 득세한다. 그들은 언론을 활용해서 없는 무엇인가를 만들어내고, 사람들을 자신들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서 우호적인 언론 환경을 만들어 간다. 그렇게 해서 이들은 언론과 연합하여 권력을 유지하고, 자원을 배분하는 정치적 힘을 왜곡해서 우리 사회를 몰락하게 만든다. 만일 우리가 언론이 제공하는 정보를 무비판적이고 비(非)성찰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그것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끌어안고 사는 꼴이 된다. 언론의 역기능은 이러한 언론과 권력의 야합 그리고 비효율적인 시장에서의 주도권을 유지하려는 목적에 의해서 발생한다. 그리고 시민사회의 힘이 약할 때 언론의 역기능은 계속 확대 재생산되며 지속적인 위험을 양산하게 된다. 


나. 언론의 배태성과 위기  


언론을 필요로 하는 집단이 언론 기능까지 수행하게 되면 사회적 권력뿐 아니라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권력까지 장악하여 언론 권력이 된다. 기계적으로 일반화하는 비판도 문제이지만, 드러난 사실에는 눈을 감고 드러나지 않은 사실에 대해서는 ‘뭔가 있겠지’라는 식의 언론보도도 문제다. 자극적인 제목과 함께 현장 검증 없이 가짜 뉴스를 그대로 내보내는 보도 행태들은 말문을 막히게 한다. 특히나 대선을 앞두고 언론이 보이는 행태를 보면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일벌백계하는 처벌을 강화할 경우에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언론이 문제라면 그 언론이 활동하는 공간에서 언론 판(생태계)을 재구성해야 한다. 언론의 공간은 국가와 자본주의 안에 배태되어 있기 때문에 그 배태된 기초와 토대를 바꾸어야 한다. 다시 말해 언론의 출발을 이해하고, 그것의 구조를 사회변동에 맞추어 변화시켜야 한다. 무조건 언론에 적대적일 필요는 없다. 문제는 언론이 제대로 기능하도록 제도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려면 언론이 국가와 시장 안에 배태되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 먼저 천착해야 한다. 


근대 국민국가가 가지는 이데올로기적 성격으로 인해 언론은 국가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봉건시대에는 왕과 특권층을 위해서 국가가 존재했지만, 자본주의 시대에는 부르주아에게 권력이 넘어가게 된다. 부르주아들은 자신들의 경제력 확대 및 자본주의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 국가의 정치 질서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부상하는 노동자 계급들을 억누르고, 자본주의 중심의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도구로 언론을 이용했다. 다른 한편으로 19세기에 윤전기가 개발되면서 다수에게 값싸게 신문을 팔 수 있게 되자, 이 시기부터 언론은 다양한 사람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그것의 대가로 광고를 싣기 시작했다. 이로써 출판 자본주의의 재생산은 인쇄물 형태의 신문 판매 수입에서 광고 수입으로 변화하게 되고, 언론은 급속하게 성장하게 된다. 

기술 발달과 사상(종교)의 자유가 싹텄던 근대 초반에 성장하기 시작한 자본주의는 언론이 태어난 계기인 동시에 언론의 발전을 추동하는 힘이었다. 그러나 언론은 늘 국가에 예속되어 왔고, 국가의 제도와 정치 구조 아래서 억눌림을 당했다. 이러한 언론이 국가로부터 조금씩 해방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초, 대규모 전쟁을 수행 중이던 국가에 언론이 필요한 존재로 부각되고 대중에게도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시점부터였다. 전쟁 이후 시민들의 사회 참여가 확대되고 민주주의가 확산하면서 언론이 대중의 편에 서기 시작했다. 그것은 다수에게 물건을 팔아 이익을 얻으려는 자본주의 논리에 따르자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권력의 흐름이 대중으로 이동한 것은 정치적 자유와 시민권이 확대되면서 나타난 것이다. 이제는 대중이 언론의 소비자가 되었다. 즉, 노동자들이 착취의 대상이 아니라 소비자로서 권력을 갖게 된 것이다. 이 기점에서 언론도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하여 국가와 시민사회(대중)로부터 자율적인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언론이 민주주의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고 믿게 된 신화의 계기가 바로 이 시기에 형성된 것이다. 

때마침 자본주의도 노동자를 소비자로 인식하고 착취의 방법을 변경하게 된다. 많은 물건을 만들고 그것을 소비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노동자들을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만 살 수 있는 존재로 만들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스스로 주체가 되었다고 인식하게 된 노동자들은 정치적 참정권이 확대되고, 시민권까지 포괄적이며 보편적으로 인정받게 되자 새로운 형태의 소비문화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언론도 새롭게 광고 시장을 확대하여 광고를 기반으로 무한 성장하기 시작했다. 영화, 라디오, TV까지 언론이 영역을 확대할 수 있는 방송통신 기술도 계속 발전하였다. 이 시기에 언론은 국가와 사회로부터 자율적으로 존재하며, 자신들의 기반을 넓히는 토대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자본주의의 발전과 민주주의 확대에 따른 일종의 숟가락 얹기나 다름없었다. 사실 언론은 국가의 제도나 자본주의 광고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언론의 그러한 본질적 성향은 변화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시장과 국가 그리고 시민사회로부터 자신들이 독립적이라고 인식할 때부터 언론은 독점적인 정보전달 역량을 기반으로 권력을 행사하며 군림하기 시작했다. 독점적 정보전달 매체로서 언론은 정보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생존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방식대로 여론의 방향을 바꾸어 나가기 시작한다. 그 결과 언론은 정보를 있는 그대로 전달하지 않고, 색깔을 입히고 변형시켜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꾸며 왜곡된 정보를 전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러한 행태가 누적되던 차에 사회변동이 촉발되자 중앙 집중적인 시스템에 의해서 양산되는 정보만을 전달하던 언론에 위기가 찾아왔다. 바로 AI 시대 개인 미디어의 발달에 따라 기성 언론의 정보 독점에 균열이 생긴 것이다. 


이러한 언론의 위기는 신뢰의 위기와 축적의 위기로 압축된다. 먼저 신뢰의 위기를 이야기하자면 전 세계적으로 ‘저널리즘의 위기’라고도 불린다. 전두환이 지배하던 1980년대에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물건이 좋은 것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할 때의 기준은 그 물건이 신문에 나왔는가, 아닌가 하는 점이었다. 신문이나 방송에 나온 상품은 믿을 만하고, 그렇지 않으면 제품의 수준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만큼 언론이란 존재가 독재에 협력하고 있었는데도 대중들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언론을 무한정 신뢰했다. 그런데 시대가 바뀌었다. 소비자들이 직접 정보를 획득할 수 있게 되자 정보의 출처에 대해서 의심하고, 언론이 색깔을 입힌 정보를 가려내어 자신이 필요로 하는 정보를 찾아서 보기 시작했다. 독점적인 언론을 벗어나 다른 대안이 제공되자 기존 언론이 제공하던 가공된 정보에 대한 신뢰는 무너졌다. 더욱이 정권이 바뀌면 그에 따라 언론의 논조가 바뀌는 형국에 언론에 대한 신뢰는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국가권력의 눈치를 보는 언론이 늘어난 것은, 사실 자본 축적 과정에서 국가로부터 보호를 받기 위한 주요한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그로 인해 언론은 시민들로부터 신뢰를 상실하고,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변화해야 했지만, 언론은 그러지 못했다. 언론에 대한 신뢰가 상실되고, 더 이상 언론에 의존하지 않는 소비자들이 많아지면서 언론의 자본 축적도 상대적으로 많이 약해졌다. 이것이 바로 자본 축적의 위기로 이어진다. 소위 스마트폰 세대는 모바일이라는 기기를 통해서 정보 관련 생산, 소비, 유통을 직접 담당한다. 소비자들은 예전에는 프로슈머(Prosumer)였지만, 이제는 프로슘버러(Prosumverer)가 된다. 즉, 소비자가 프로듀서(producer), 컨슈머(consumer), 그리고 딜리버러(deliverer)의 모든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스마트폰 세대에서는 독점 언론의 영향력에서 그만큼 비켜나간 덕분에 광고 시장이 확대되었지만, 그로 인해 기존 언론들은 오히려 독점적인 광고 수익을 잃게 되어 축적의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기존 언론은 국가와 시장에 더 밀착해서 위기를 극복하려 하고, 거대한 기업으로의 합병을 통해 덩치만 키우는 방식으로 변화를 꾀하고 있다. 언론과 그를 둘러싼 환경은 쉽게 바뀔 것 같지 않다. 전 세계의 보편적인 특징 중 하나가 대체로 한 집단을 이루는 구성원들은 그 안에서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하나로 통합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같은 직업을 가진 이들은 늘 경쟁 속에서 살기 때문에 서로를 동일한 집단으로 인식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데 한국에서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동일한 직종에 종사하는 이들이 동일한 의식을 공유하는 예외적 집단이 있다. 그들이 바로 언론에 종사하는 이들이다. 언론인들은 서로 다른 배경을 가졌더라도 서로를 선후배로 부르면서 친밀함을 유지한다. 배경이 다르고 분야가 다르면 한 집단을 구성하기 어려운 법이지만, 언론인들은 하나의 뿌리처럼 움직인다. 외부의 비판이 언론의 근본 문제에 가해지면 하나로 뭉쳐서 위기에 대응한다. 언론인들은 모두가 선후배라는 집단의식에 자신들을 가두어 놓고 있다. 경쟁하며 싸우더라도 자신들의 이익 기반이 되는 시스템과 구조는 변화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언론이 가지는 근본적인 경쟁력 저하의 문제가 발생하고, 시장과 국가에 더욱 밀착하여 대중과 여론에서 멀어지게 되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언론개혁을 위해서는 언론의 독점 구조와 언론 종사자들의 집단우월주의를 깨는 것이 시급하다. 현재의 언론 구조는 중앙 집중화되어 있다. 언론을 그러한 패권주의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것은 경쟁 구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언론 구조 개편, 즉 고비용의 언론 구조를 개혁하기보다는 거대자본을 가진 회사로 편입되어 가는 공룡화로 세계 변화에 대응하고자 하는 잘못된 전략으로 일관해 왔다. 그러다 보니 정권의 변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중의 비판적이고 부정적 시선에도 굴복하지 않은 채 자신의 길만을 가려고 하는 언론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런 대규모의 중앙 집중화된 언론의 지지를 받고자 정치가들이 줄을 서면서 언론과 정치의 상호의존 현상이 심화되어 온 것이다. 언론을 적으로 삼지 않으려고 하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언론이 시민을 가르치고 지도하려고 하는 경향은 더욱 강해질 것이고, 언론의 위기는 더욱 심각하게 다가오게 될 것이다. 이러한 왜곡된 구조를 벗어나기 위해서 다수의 언론을 만드는 일은 구조적인 분업에서 시작되지만, 보다 실질적으로는 다양한 주체가 언론에 뛰어들 때 가능해진다. 


다. 조선의 독점적 구조와 분화 


조선 전근대 농경사회에서는 붕당을 통해 경쟁하는 양반들과 도덕경제에 의존하며 서로 보호하던 공동체가 공존하였다. 공적 관직(문반, 무반)을 가리켰던 양반이 신분 범주로 전환된 후, 계속하여 이익을 독점하기 위해 경쟁해야 했던 조선 양반 사대부들은 토지라는 한정된 자원이 부족해지자 붕당을 형성하여 자원 독점을 시도했다. 이에 중앙권력 장악을 통한 물적 자원 독점을 놓고 기존 권력인 훈구파와 새롭게 중앙정계에 진출한 사림이 대립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림은 성리학을 바라보는 학문적 관점에 따라 구분되었던 학파를 다시 스승 중심의 위계적으로 서열화한 이익집단으로 변화시켰다. 권력을 장악한 사림은 국가기구를 독점하고 전용하여 자신들의 이권을 획득하고 유지하려 하였다. 이처럼 붕당은 경쟁 부재에서 본격적 경쟁의 시기로 전환되던 시기에 이익을 독점할 목적으로 등장하였고, 16세기 이조전랑 자리를 놓고 동인과 서인이 갈리는 등 일련의 우연적 사건들을 통해서 남인과 북인, 대북과 소북, 벽파와 시파 등으로 분화되었다.


조선의 양반이 분화되었던 과정처럼 하나의 단일집단으로 정리가 되어 있던 언론의 생태계에도 다양한 언론 집단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지역을 매개로 하는 독립 언론은 기존 주류 언론의 정보 독점에 반기를 들며 나타났다. 물론 주류 언론도 가만히 있지 않고 독립 언론 영역에 진입하기 시작했지만, 독립 언론은 정보 생산과 전달의 대상이 중앙이 아니라 지역에 있다는 점에서 주류 언론과 본질적인 차이를 드러낸다. 언론이 견제와 균형의 원리에 따라 설계되어 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시장과 국가에 의존하면서 성장해 왔기 때문에, 이제라도 언론은 시장과 국가가 아닌 시민의 손에 의해서 견제와 균형의 원리 속에 움직여져야만 한다. 제도는 아무리 잘 설계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소수 집권자나 권력자들에 의해 전용되기 쉽다. 현재의 주류 언론은 재벌, 족벌, 그리고 보수 집권층들에 의해 전용되고 있고, 천민자본주의에 따라 움직여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조선의 정치권력도 본래 견제와 균형의 원리에 따라 설계되어 있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기구와 관리들은 먼저 품계를 받고, 대체로 그 품계에 따라 보직을 맡도록 했다. 품계는 9품에 다시 정(正)과 종(從)으로 분화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국가 최고 기구인 의정부의 장은 정1품, 그 아래 왕의 명을 받아 죄인을 심문하는 의금부의 장은 종1품, 육조의 장인 판서와 한성부 윤(尹)은 정2품인 식이다. 정3품으로 흔히 삼사(三司)로 통칭하는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에다 같은 품계인 성균관과 승정원을 더해 5대 청요직(淸要職)으로 불렀다. 왕과 의정부를 기준으로 권력이 나뉘어 있는 구조였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권력의 균형이 중요하였다. 그러나 권력을 독점하고자 하는 이들이 나타나고, 그로 인해 분열이 일어나 붕당이 형성되었다. 조선 양반의 붕당 형성 과정을 보면 균형을 위해서 만들어놓은 제도가 특정한 집단에 의해서 소비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잘 보여준다.


동인과 서인 분열의 빌미가 된 이조전랑(吏曹銓郞)은 이조의 정5품 정랑(정5품)과 병조의 정6품 좌랑(佐郞)을 함께 이르는 말이다. 관원을 천거하고 전형(銓衡)하는 권한을 가졌으므로 ‘전랑’이라고 불렀다. 관원을 선발하는 이조의 장에 권력이 집중되지 않도록 관리를 감찰하는 사헌부, 간언과 탄핵을 담당하는 사간원, 왕의 국정 자문을 담당하는 홍문관의 삼사 관원의 선발만은 이조판서에게 맡기지 않고 오로지 전랑에 맡겼다. 이에 따라 이조의 낭관은 삼사의 언론권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실제 품계보다 큰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지위의 다양함과 분업 그리고 어떤 기구도 독점적으로 구성하지 못하도록 구조화된 조선 관료제에서 품계보다 더 높은 권한을 가진 것이 전랑이었다. 전랑도 삼사의 견제를 받아야 했지만, 전랑이 인사권을 통해 삼사를 통제하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왕권과 재상에 의해서 견제를 받게 된다. 전랑에게는 후임 지명권인 자대권(自代權), 각 기관 당하관의 천거, 홍문관 등 삼사 청요직의 선발권인 통청권(通淸權), 급제하지 못한 재야의 인재를 선발하는 낭천권(郞薦權, 부천권이라고도 불림) 등이 부여되었고, 중죄가 아니면 탄핵받지 않았고 순조로운 승진이 보장되었다. 이처럼 높은 권한을 가진 전랑 지위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은 매우 치열했는데, 이는 전랑 제도를 폐지하거나 전랑의 권력을 나누어 견제를 통해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하기보다 전랑의 지위를 차지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더 이익이 된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사실 붕당 출현은 심의겸과 김효원이 각기 자신의 집단 구성원을 전랑에 임명하려고 하다 발생한 싸움이 선행조건들인 ‘유교 이념 분화’와 ‘양반 관료 분화’와 연결되어 나타난 것이다. 전랑의 권한은 특히 중종 이후부터 더욱 강화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훈구대신 중심의 정국에서 사림이 낭관과 삼사에 임명되어 훈구대신들에게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중종이 정국 주도권을 쥐기 위한 의도에서 강화한 것이다.


조선 사회가 권력 분점을 통해서 안정적인 운영을 추구했음에도 불안정하게 유지되었던 것은 결과적으로 권력 독점을 예방하지 못했기 때문이었고, 더 근본적으로는 신구의 권력 집단이 대체되는 과정에서도 그 권력의 독점 구조가 전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역 중심의 공고한 권력 구조 구축이 중앙과 연계되면서 중앙에 끊임없이 권력의 자원을 제공했고, 그로부터 이익을 추구하는 하나의 집단이 구성되었다. 이러한 사회 구성은 이 시기의 조선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그 속에서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새로운 질서로 전환하려는 힘은 약해졌다. 한 집단이 독점하는 사회는 진보가 없다. 또한 중앙과 지역이 하나의 권력 집단을 형성해도 마찬가지의 결과에 빠진다. 권력은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겠지만, 사회는 그만큼 정체가 된다. 


라. 현대에서의 언론 독점 해체 


그런데 현대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계속 일어난다. 언론이 중요한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면서, 언론은 이제 모든 이들이 독점적인 관계를 유지하려고 시도하는 대상이 되었다. 낮은 품계에도 불구하고 지배력을 행사한 전랑처럼, 이 시대 언론은 견제되지 않은 채 동일한 집단의 힘으로 보수적 권력을 유지하려고 한다. 우리가 희망 유발자가 되기 위해서는 언론의 제도적 역할을 주문해야 한다. 


언론이 객관적이고 공정하다는 신화는 19세기 중반 노동자들이 전반적으로 생산과 소비의 주체로 등장하면서 시작되었다. 정파적인 내용만을 제시하던 신문이 다수의 노동자에게 호소력을 갖추기 위해서 사실 중심의 뉴스를 전달하고, 감정이나 비이성적인 판단에 의존하기보다 이성과 사실에 기초하여 기사를 전달하면서 대중이 사실에 초점을 두고 받아들이는 문화가 형성되었다. 제1, 2차 세계대전 이후 시민들의 사회적 참여가 많아지고 정치가 민주화되면서, 언론도 국가와 시장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달콤한 과실을 언론이 맛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1950년대 문화와 경제에서의 부흥이 일어나면서 전 세계적으로 언론의 역할은 더욱 증가하였다. 한국에서도 1990년대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민주화를 통해 독점적 정치권력을 유지하던 이들이 사라지자, 언론이 대신 그 자리에 서서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려는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진실은 사라지고 가공된 사실이 진실인 양 제시되었으며, 무엇을 해도 반대의 논리로 비난을 받아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경제구조가 바뀌면 사회구조에도 변화가 뒤따랐다. 인식론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늘 서로 다른 해석을 가져오게 마련이다. 21세기 언론의 시장 구조는 이런 인식에 따라서 다양한 정보의 생산, 전달 그리고 소비 주체들에 의해서 주도될 것이다. 정보 생산과 전달의 독점 구조는 이미 깨지고 있다. 기술 발전이 언론의 생태계를 시작했다면, 이제 생태계를 완성할 시점이 되었다. 중앙의 언론 시장을 시민 중심으로 재편하는 일은 중앙 언론의 먹거리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는 일에서 시작해야 한다. 먼저, 현재 한국 언론의 병폐 중 하나인 신문에서 광고 단가를 조절하는 ABC 제도(광고 단가를 매길 때 유료 발행 부수를 기준으로 삼는 제도)를 없애고, 방송에서도 민영 방송이라는 이름으로 검증되지 않은 뉴스를 만들어내고 자신의 지주 회사를 위해서 방송이 활용되는 일이 없어져야 한다. 또한 정보 생산 및 분배 과정 모두를 독점하고 이익을 독점하는 족벌·재벌 신문과 방송에 경제적인 재생산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근대화 과정에서 방송법과 신문법 등 독재정권이 국가를 통치하던 시기에 언론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제시했던 당근들을 이제는 제거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금전적인 지원을 통해서 지역 언론을 소생시키려는 시도는 말기 암환자에게 진통제를 투여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임시방편적인 정책이므로 지양되어야 한다. 보다 근본적으로 중앙 집중화된 언론 시장에 돌을 던져서 파장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재벌 언론과 족벌 언론들의 생태 환경을 파괴할 제도를 만드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각 지역에서 시민들이 중심이 되는 언론 거점이 마련되어야 한다. 지역 언론은 지역 시민의 손에 의해서 생산되고 유통되어야 한다. 지역은 모든 사회의 총체가 등나무 가지처럼 꼬여 있는 공간이다. 여기에서 지역민들이 상호 교통하고 자신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만들어 가도록 지원해야 한다. 중앙 일간지나 중앙 방송의 지역 뉴스 꼭지가 아니라 시민이 주체가 되는 지역에서의 삶을 보여주어야 한다. 단순한 금전적인 지원보다 이들이 지역에서 새로운 생태계를 만들어 중앙 언론이 지역에 침투하지 못하도록 하며, 또한 그러한 생태계를 통해 다른 지역의 언론 주체들과의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예전에 TV 광고에서 하나의 큰 덩어리로 움직이는 듯한 물고기 떼를 본 적이 있다. 물고기 떼는 앞을 향해 나아가다가 거대한 바위를 만나면 순식간에 흩어졌다 다시 새롭게 진열을 정비한다. 순간의 재빠른 움직임에도 작은 물고기들의 커다란 무리는 전혀 흐트러짐이 없다. 그러나 만약 이 거대한 물고기 떼가 한 마리의 고래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도 그 고래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앞으로 유영해 나가던 자신의 힘으로 바위와 충돌할 것이다. 현재의 언론은 바로 그런 거대한 고래와 같다. 네트워크화된 지역 언론은 지역 내에서는 플랫폼 역할을 하며 정보의 구심점으로 작동하지만, 네트워크 안에서는 늘 움직이며 다른 집단과 또 다른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존재가 된다. 이런 과정에서 거대 언론이 누군가를 맹목적으로 비판하게 만들거나 시민을 불안하고 분노하게 만들 때 그런 일을 언론이 더 이상 하지 못하게 하는 시민적 강제가 일어난다. 그리고 분노가 일어난다면 이제 그 분노를 문제 해결에 필요한 에너지로 전환하도록 만들어가야 한다. 지역은 언론인 자신들이 시민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공간이자 사회이기도 하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시민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고 자신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교환하는 매개로서의 언론은, 무엇보다 생산과 전달을 주체적으로 하는 지역 언론으로서 성장해야 한다. 그러나 지역 언론 또한 지역의 토호에 의해서 움직인다면 중앙 언론의 식민지로 전락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토호가 아닌 다수의 개인이 물고기 떼를 구성하여 마치 한 마리 큰 고래처럼 움직이는, 즉 주체적 시민이 곧 언론의 주체가 될 때 언론이라는 플랫폼은 서로에게 희망을 전달하고 슬픔과 불안은 나누어 약하게 만들 수 있는 거점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자신의 이야기 그리고 이웃의 이야기를 만들고 전달하는 다양한 독립 언론들이 중앙으로부터 독립적으로 곳곳에 존재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분노 유발자가 된 주류 언론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거대자본과의 싸움에서 독립적인 방식으로 살아남으려면 기존의 방식에서 탈피해야 한다. 느리게 걷기는 느리게 시작해야 한다. 자본의 투자 그리고 성장 순환에서 다양한 시민들의 참여 확대로 나아가는 방식은 천천히 가야 하는 방식이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의 방식과 가치의 전환도 함께 이뤄진다. 급하게 경쟁하면 중앙 집권화된 대기업 중심의 언론과 경쟁할 수 없고, 지방정부에 의존적인 지방 언론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에게는 정보의 생산과 유통을 스스로 담당하면서 동시에 그 정보들을 당면한 문제 해결에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시민의 존재가 필요하다. 지역에서의 언론의 역할은 문제 제기뿐 아니라 문제 해결에 동시에 천착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지역에 대한 문제는 그 지역에 사는 시민이 가장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이 이미 해결의 실마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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