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호/2022.06][배움] 낯선 이들의 느슨한 연대가 빚어내는 다채로운 세상

평화저널 플랜P
2022-08-26

글 김찬호

사회학을 전공하고 대학에서는 문화인류학, 사회학, 교육학 등을 강의하고 있고, 대학 바깥에서 부모 교육, 노년의 삶, 교사의 정체성, 마을만들기, 다양한 주제에 걸쳐서 인문학적인 관점에서 글을 쓰고 대중 강연을 하고 있다. 

 

2017년 서울시교육청이 강서구에 장애인학교를 세우려 할 때 일부 주민들이 ‘결사반대’에 나선 일이 있다.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주민설명회가 열렸는데, 거기에서도 반대 주민들이 격렬하게 당국을 성토했다. 그때 장애아를 키우는 몇몇 어머니들이 갑자기 강당 바닥에 무릎을 꿇고 설립을 허락해달라고 애원했고, 그 장면을 찍은 영상이 SNS를 통해 널리 퍼져나갔다. 설명회에서 거친 언사로 특수학교 계획을 비판하는 주민에게 장애아를 키우는 어느 어머니가 물었다. 도대체 우리 아이들이 왜 그렇게 싫냐고, 무엇이 문제냐고. 반대 운동을 주도하던 어느 주민이 대답했다. 그냥 보기 싫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가치관이나 취향을 갖고 살아간다. 그것이 비슷할수록 관계 맺기가 쉬워지고 집단의 결속력도 높아진다. 전통사회의 공동체에서는 대체로 동질적인 문화를 공유했고 그 내부에서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이 첨예하지 않았다. 그에 비해 현대사회에서는 전혀 다른 생각과 정서를 가진 사람들이 뒤섞여 살아간다. 다양성은 즐거움과 창의성의 원천이 되기도 하고, 사안에 따라서는 이질감을 자아내고 마찰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후자의 경우 역학 관계에 따라서 한쪽이 다른 쪽을 일방적으로 배척하는 상황으로 비화되기 쉽다. 장애인이나 성소수자가 보기 싫다는 선언은 전형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다.  

   

왜 보고 싶지 않은가. 자기를 위협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인간은 대상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려는 욕망을 갖고 있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삶의 문법에 상대방을 온전히 포섭하고 싶은 것이다. 근대적 주체는 그러한 자기 동일화와 전체화의 경향을 강하게 드러낸다. 하지만 어차피 사람은 제각각이기 때문에 자기의 질서로 환원되지 않는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을 수용하려면,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서 이해해야 한다. 철학자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그것을 ‘타자성’(altérité)이라고 불렀다. 결코 대상화하거나 환원할 수 없는 절대적 타자성을 마주하게 될 때 우리는 불편함 또는 불쾌함을 느끼게 된다.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다름을 소탕해버리려는 충동이 폭력적으로 표출되기도 하고, 그 에너지가 집단화되어 전체주의로 나아가기도 한다.

그런데 그러한 타자성은 자기 안에도 존재한다. 우리는 낯선 존재들을 통해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했던 내 안의 이질성을 문득 마주치게 되는데 그것은 두려운 일일 수 있다. 오랫동안 견지해온 세계관이 흔들리면서 존재가 위협받는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하여 그 단초를 제공한 타인을 자아의 온전함을 훼손하는 이물질처럼 여긴다. 기생충 같은 벌레로 취급하면서 아예 시야에서 사라지도록 박멸하려 한다. 이러한 비인간화의 바탕에 깔려있는 선입관과 편견은 동질적인 - 엄밀히 말하자면 스스로 동질적이라고 여기는 - 사람들의 비좁은 응집 속에서 증폭되고, 이질적인 집단을 더욱 철저하게 배제하려는 움직임으로 나아간다. 그러한 악순환에서 벗어나려면 인식의 틀을 어떻게 바꿔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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