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호/2022.09][전문공개/ Focus on 평화기행 대담 특집] 양구 DMZ 펀치볼 평화기행

평화저널 플랜P
2022-09-21


접경지대 로컬리티, 양구 DMZ 펀치볼 평화기행


글 김복기(플랜P 발행인)

                         

비록 짧은 하루의 여정이지만, ‘강원피스투어’ 이기찬 대표와 플랜P 편집위원들이 양구 펀치볼로 평화기행을 떠났다. 어디론가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늘 신나는 일이다. 가슴이 설레고, 함께하는 사람이 기다려지고, 또 걸어갈 길과 여정이 기대된다. 그런 기다림과 기대가 있기에 사람들은 여행을 떠나는가 보다. 도심을 조금 벗어나자마자 온통 눈을 시리게 만드는 푸르른 녹음이 우거진 산과 계곡을 넘나들며 굽이굽이 이어졌다. 아직도 지뢰가 곳곳에 남아있어 허가 없이는 들어갈 수 없는 길, 어쩌면 그러기에 원시적 아름다움이 간직된 곳. 우리는 펀치볼 둘레길 자락을 걷기와 멈추기를 반복해가며 천천히 올라갔다. 한 걸음씩 밟아 올라갈수록 점점 더 선명하게 펼쳐지는 장관은 여기저기서 탄성을 자아냈다. 이윽고 정상에 오르자 펀치볼의 아름다운 자태가 한눈에 들어왔다. 

9호 편집회의에서 ‘Place’가 키워드로 언급되었을 때, 내게는 신기하게도 ‘평화기행’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평화와 장소성이라! 전쟁이 주는 강렬한 인상과 달리 희미하게만 다가오는 평화 개념을 장소에 대한 기억으로 소환해 내고 싶었던 것일까? 숱한 전쟁과 폭력을 겪어온 이 나라에서 전쟁과 폭력의 장소를 떠올리기란 너무도 쉽다. 반면 평화에 관해 이야기하고, 평화의 장소를 떠올리기란 좀처럼 쉽지 않은 것이 우리의 현주소다. 평화의 이미지나 평화의 장소를 떠올려보라고 하면, 기껏해야 비둘기가 날아오르는 광경이나 조용한 마을, 평화공원 정도가 아닐까 싶다.

이렇게 평화의 장소성에 대해 고민하던 차에 모두가 의기투합하여 접경지대 평화기행을 기획하게 되었고, 때마침 강원피스투어와 연결되었다. 강원피스투어는 기본적으로 ‘다크투어’의 컨셉을 갖고 있으나, 이름에서 드러나듯 어두운. 기억보다는 ‘평화’의 의미를 더 부각시키고 있다. 강원피스투어는 강원도 DMZ 접경지역에서 평화여행·체류·교육·교류 프로그램을 제공하며, DMZ의 역사·생태·지역·문화 자원을 활용한 공간을 조성하고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다. 강원피스투어의 이기찬 대표의 안내를 따라 우리가 떠난 하루 일정은 다음과 같다.


남춘천역 근처 집결 – 양구종합운동장 – 양구 펀치볼 둘레길 트래킹 – 점심식사 – 양구전쟁기념관 – 박수근 미술관 – 카페 ‘까미노’에서의 마무리 대담


펀치볼 레길 트래킹

여행의 주 목적지인 ‘펀치볼’은 행정구역상 양구군 해안면에 속한다. 밀고 밀리는 전투가 한창이었던 1951년 6월부터 12월까지 양구 인근에서는 총 아홉 번에 달하는 격렬한 고지전이 치러졌다. 특별히 이 지역은 중동부 전선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라 종군 기자들도 취재를 많이 왔었다. 그런데 지형이 분지라 봄·가을이면 아침, 저녁으로 안개가 자욱하게 깔리고, 그 사이로 해가 뜨고 지면서 안개가 붉은색으로 물이 든다. 그 광경이 마치 하와이안 펀치볼(펀치볼은 화채 그릇이라는 뜻)을 닮았다고 하여 펀치볼이란 별칭이 붙게 되었다.

       편치볼 둘레길 사이를 흐르는 실계곡

이곳 양구 해안면은 DMZ 접경지대이자 안보 관광지로 알려져 있다. 을지전망대, 제4땅굴, 양구통일관, 전쟁기념관, 2010년에 조성된 펀치볼 둘레길, DMZ자생식물원 등이 자리하고 있다. 펀치볼 둘레길은 소위 민간인통제선 안에 있는 유일한 둘레길로 여전히 미확인 지뢰 지역, 대형 벙커, 철조망 등 각종 군사시설이 남아있어 반드시 미리 예약을 하고 등산지도사의 안내를 받아야만 입산이 가능하다. 이곳에는 총 72km에 이르는 4개의 둘레길 노선이 있는데, 우리는 등산지도사의 안내를 받으며 비교적 짧은 코스로 1시간 30분 정도를 걸었다. 사람들의 자유로운 방문이 어려운 곳이다 보니 그만큼 원시림에 가깝다. 둘레길 자락에는 높은 지형에도 불구하고 도랑을 이룰 정도의 큰 물줄기가 곳곳에 실계곡을 이루며 흘러내렸다. 여느 산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라 신비로움마저 감돌았다. 얼레지, 명이나물, 음나무 군락지는 물론 금강초롱과 같은 희귀식물도 직접 볼 수 있었다. 원초적인 흙내음, 시원한 바람, 투명한 푸르름, 탁 트인 시야는 산행의 진미다. 등산지도사의 안내를 받으며 둘레길을 내려오니, 이 지역의 식생을 관리하고 연구하는 ‘국립DMZ자생식물원’이 더운 날씨에 등산을 마친 우리를 반가이 맞아 주었다. 


펀치볼 둘레길, 미확인 지뢰를 경고하고 있다.

원래 코로나가 아니라면 다음 행선지로 을지전망대나 제4땅굴을 방문했겠지만, 이 두 곳은 지난 2년 동안 코로나로 폐쇄되어 올해 연말까지 시설 개선 공사 중이라 아쉽게도 발길을 돌려야 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던가. 오전의 산행으로 출출해진 배를 채우기 위해 지역 식당에 들어섰다. 양구는 원래 시래기와 곰취로 유명한지라 나물밥이 아주 꿀맛이다. 밥맛도 좋았거니와 지역 농산물로 만든 손맛 가득한 반찬은 눈과 입을 즐겁게 해주었다. 게다가 후식으로 준비된 식혜는 시골의 맛을 그대로 느끼게 해주어 거푸 두 잔을 들이마셨다. 여유롭게 식사를 마친 우리 일행은 가까이에 있는 ‘양구전쟁기념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양구전쟁기념관

양구의 펀치볼이 그렇듯이, 전쟁은 여러 곳의 지명을 바꾸어 놓았다. 철원의 아이스크림 고지나 백마고지, 화천의 파로호는 모두 6·25전쟁과 관련이 있다. 양구전쟁기념관 입구에는 총 9개의 콘크리트 기둥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는 펀치볼 주변에서 펼쳐진 9개의 고지전(도솔산, 대우산, 피의 능선, 백석산, 펀치볼, 가칠봉, 단장의 능선, 949고지, 크리스마스고지 전투)을 상징하며, 전투가 벌어진 고지의 높이에 따라 기둥의 높낮이가 다르다. 2000년 6월에 개관한 이 전쟁기념관은 무념의 장, 환영의 장, 만남의 장, 이해의 장, 체험의 장, 확인의 장, 추념의 장, 사색의 장으로 나뉘어 예술적인 조형에 노력하였으나, 내용적으로는 여전히 전형적인 전쟁 서사를 따르고 있었다. 전쟁기념관 바로 옆에 안내소 역할을 담당하는 ‘양구통일관’ 역시 통일 의지를 고취 시키는 교육장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어떻게 하면 반공, 안보의 개념을 평화의 개념으로 바꿀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통일담론을 평화담론으로 성숙시켜 나갈지 깊이 고민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단순히 전쟁 서사에 머물지 않고 전쟁 이후의 시간과 지역과 문화라는 문맥 속에서 건축예술의 의미를 추구하고 반영하고자 했던 ‘이성관 건축가’의 고민 어린 흔적을 볼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었다.

양구전쟁기념관 입구에 서있는 9개의 콘크리트 기둥 – 펀치볼 주위에서 펼쳐진 9개의 고지전을 상징하며 고지의 높이에 따라 기둥의 높낮이가 다르다. 9개의 고지전 중 ‘가칠봉 전투’는 6차례를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접전을 치른 곳으로 이 전투에서 국군 5사단은 600여 명이 전사하고 400여 명의 실종자 북한군은 1천여 명이 사살당하고 250여 명이 생포되었다.


박수근 미술관


이어 양구 읍내의 명물로 떠오른 박수근 미술관을 방문했다. 미술관은 박수근 선생의 생가터에 지어졌는데, 주변 경관과 어우러지는 절제된 아름다움이 돋보여 선생의 소박한 삶을 잘 표현해주었다. 평생을 가난하게 살며, 가난한 이들의 삶을 향한 따듯한 시선을 멈추지 않았던 그의 그림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정화 시킨다. 이곳에서는 각자 한국 미술의 거장 김수근의 일생을 돌아보면서 여유로운 사색의 시간을 가졌다. 양구 여행을 마무리하며 마음을 정리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선택지였다.


카페 ‘까미노’에서의 왁자지껄 평화 대담

     강원피스투어의 이기찬 대표

모든 일정을 마치고, 우리는 이기찬 대표가 추천한 카페 ‘까미노’로 향했다. 주인분이 직접 만든 콤부차와 양구 사과로 만든 애플 케잌이 일품이라고 했다. 도착하자마자 콤부차와 사과 케잌을 주문했다. 하루의 피로는 씻어주는 청량한 콤부차와 상큼한 사과 향이 가득한 케잌은 역시 고급스러운 맛이 일품이었다. 까미노에서 마주 앉은 일행은 짧지만 소중했던 하루의 일정을 정리하며 각자의 소회를 나누었다.

우선 비 예보가 있었는데 비가 내리지 않아 다행인 하루였다고 모두 고마워했다. 장소성이 없는 기억은 성립하기 힘들기에 함께 방문했던 곳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각자의 소중한 감상을 공유했다. 펀치볼 트래킹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멋진 여정이었다는 의견부터 아홉 개의 고지전의 전투 이름 중 크리스마스 고지전이나 단장의 능선 고지전이라는 이름이 인상 깊었다는 감상. 피스투어로 풀어낼 많은 자료가 있는 지역이 바로 양구라는 소회가 이어졌다. 

특히 펀치볼의 역사에 대한 설명 중 전쟁으로 모든 마을이 파괴되자 정부가 펀치볼을 재건촌으로 계획했고, 주인 없는 땅을 국가가 무주지(無主地)로 규정하여 관리하고 있다는 것, 전쟁이 누군가는 고향을 떠나게 하고 누군가는 새로 옮겨와 정착하게 함으로써 마을 구성원들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결국 전쟁 이후 장소성을 말할 수 있을까, 재건촌으로 구성되었을 때, 원주민과 이주민이 함께 형성하는 지역성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Q. 분단 접경지대에 작동하고 있는 적대 이데올로기로 인해 양구와 같은 접경지대는 고유의 장소성과 지역성을 상실하기 쉬운데, 장소성을 회복하고 그 의미를 재구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기찬  사람이 살지 않는 마을을 상상하기 어려운데, 양구 해안면은 소위 톱질 전쟁이라 불리는 밀고 밀리는 고지전으로 원주민들이 마을을 떠났다가 갑자기 DMZ가 생기면서 마을로 돌아올 수가 없게 되었어요. 일종의 수몰지구처럼 살던 마을이. DMZ 안으로 들어가 버린 거죠. 삶의 뿌리는 송두리째 뽑혔고, 많은 사람들이 타지로 떠나갔어요. 그리고 1956년과 1972년 두 차례의 이주 정책에 따라 타지인들이 유입되어 마을이 다시 만들어졌어요. 한마디로 재건촌이죠. 그래서 땅은 있는데 지적도상 등기를 할 수 없는 지역이라 농민들이 경작권을 사고 팔면서 단기적으로 대규모 농사를 짓고 빠지는 타지분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곳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지역, 고향, 애착에 대한 개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또 여기에 자본주의가 들어와 상업적인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는데, 과거의 잣대로 장소성이나 지역성을 사고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혁민  저도 그런 상황을 생각하면 이제 ‘장소’ 자체를 하나의 고유명사로 인식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까 싶어요. 지역의 순수성이라는 것을 너무 로맨틱하게 바라봐서 그렇지, 사실 요즘 지역 사회를 보면 순수하게 자연 마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없잖아요. 장소성의 회복이라 말하면, 과연 무엇의 회복인가 굉장히 추상적으로 들려요. 전쟁을 직접 겪으신 분들도 계시지만 98%는 간접 경험한 세대들이고, 이들은 새로운 로컬리티를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양구의 새로운 정체성은 재세례를 받아야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성한  양구만 들여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데, ‘공간의 축’ 말고 ‘시간의 축’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봐요. 즉 장소성을 이야기할 때 우선 그 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 밀도 있게 몸으로 경험한 사람들이 장소성을 이야기할 수 있겠죠. 사는 사람들이 바뀌었고, 상황이 달라졌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공간에서 가장 가까이 몸으로 접하고 있는 사람들의 어떤 공통 경험이 있는 것이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장소성이 살아나고 의미가 있게 될 것이라고 봅니다.

기찬  예전에는 지역의 역사성이라는 게 분명히 있었는데, 요즘에는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고, 자본화되다 보니 탈 역사적이 되어가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기억이 있는 곳이 장소성이라고 생각해요. 같은 장소라도 어떻게 기억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잖아요. 예를 들어 고성군의 화진포에는 김일성 별장으로 유명한 곳이 있는데, 저는 그곳을 그 이전에 있었던 로제타 셔우드 홀 가족이 1938년에 지은 별장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합니다. 지역 정체성이 무엇인지 모르더라도, 그 지역에 존재하는 역사에 대해 관점을 달리함으로써 시각을 전환할 수는 있다고 봐요. 또한 장소성은 계속 변화하는 시간과 사람에 의해 바뀌는 개념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고, 현세대의 관점으로 장소성을 새롭게 탐색해볼 필요도 있습니다. 

유승  얘기를 듣다 보니 우리가 여전히 근대적인 의미에서 장소성을 이해하고, 그에 접근하려고 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장소성을 거대 담론에 의한 역사성이라든가 그 지역의 어떤 특별한 정체감과 계속 관련시키려고 하는데, 이미 우리는 세계화된 시대를 살고 있고 그런 의미에서 어떤 장소의 지역성이라는 것은 예전과는 다른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죠. 지금은 미시담론이 중요한 시대이기 때문에 각자가 의미 부여하는 장소도 각기 다르고요. 그러니까 역사적으로 중요한 장소, 공동체로서 중요한 장소 이런 것보다도 지금은 개인에게 중요한 장소가 더 큰 의미가 있는 거죠. 그리고 한 지역에 외지인들이 들어와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고, 거기서 의미를 만들어내고 있는 현상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출 필요도 있을 것 같아요. 장소성에 있어서도 결국 미시담론이 우리의 화두인 것 같아요.

복기  장소성에 있어 지금까지는 정주성을 강조했다면, 이제는 이동성에 초점을 맞춰야 된다는 말씀으로 들리네요. 안과 밖, 내지인과 외부인이 혼재하면서 새로운 정체성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고, 펀치볼의 경우도 1,500명의 해안면 주민과 500-1,000명의 이주 노동자들이 함께 살면서 새로운 장소성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 같아요. 이분법적인 사고를 벗어나서 장소성도 새롭게 표현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Q. 분단 접경지대에 대한 인식과 경험이 적대가 아닌 평화의 패러다임으로 전환되려면 어떠한 변화와 노력이 필요할까?

유승  오늘 방문한 양구전쟁박물관은 외형적인 예술성은 뛰어났으나, 여전히 그 안에 담은 내용은 반공이데올로기 중심의 서사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보았어요. 그래서 이번 여행과 같은 평화기행이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보고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공간, 새로운 장소성을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보고, 그 점에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정조가 화성을 지을 때 “아름다움이 적을 두렵게 한다”면서 화성을 아름답게 조성했다고 하더군요. 또 아름다움과 정의로움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오늘 펀치볼 둘레길이 너무 아름다워서 분단 접경지대이지만 적대적인 이데올로기를 느끼기보다는 제 안에 평화와 정의의 정서가 더 많이 올라왔던 것 같아요. 박수근 미술관이 양구에 있다는 것도 아름다움과 평화로 연결될 수 있는 지점이고, 이데올로기에 갇혀 있던 공간이 아름다움과 연결되면 안보담론이 평화 담론으로 넘어가는 데도 기여할 수 있으리라 봐요.

성한  요즈음은 안보관광과 평화관광의 개념이 왔다갔다가 하는 시기인 것 같아요. 얼마 전 철원에 있는 ‘DMZ 두루미 평화 타운’에 방문을 했었는데, 공식적으로 이름은 두루미평화마을이지만, 철원 주민들은 여전히 ‘안보관광지’로 부르고 있더군요. 이렇듯 반공이데올로기에 근거한 안보 개념에서 평화 개념으로 바뀐다는 것은 사실 큰 전환인데, 그 내용을 어떻게 채워나가 나갈 것인가가 큰 숙제인 것 같아요. 장소성을 이야기할 때 펀치볼은 그냥 전쟁이라는 역사 속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그 사실 자체는 변화하지 않을 텐데,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전과 같이 계속 안보의 이야기로 접근할 것인지 아니면 평화의 관점으로 재해석해낼 것인지 하는 몫이 우리에게 남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해석은 필요한 일이고 어려운 일이지만, 여전히 직접 가서, 그곳을 보고, 그 길을 걷고 느끼는 것은 텔레비전이나 영화로 보는 것은 물론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원체험이라고 생각하기에 저도 피스투어가 갖는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복기  우리가 산 위에서 본 부부 소나무 이야기는 거기서 밖에 할 수 없어요. 펀치볼 둘레길에서 직접 보고 느꼈던 산 위에 흐르는 물, 폴짝 튀어 오르는 개구리, 희귀한 식물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70년 전에는 격전지였고, 그 이후 뿌려놓은 발목지뢰가 여전히 묻혀 있는 그곳을 대체할 것은 없죠. 다만 한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전쟁 이야기를 할 때, 폭력 서사만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그 와중에 사람을 살리던 일들, 그러니까 전쟁 중에 있었던 생명을 살리는 일, 서로 돕는 이야기도 지속적으로 발굴하고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어떻게 하면 열린 질문, 회복적 질문을 던질 수 있는가를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장소성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생각하는 평화의 장소성은 어렵거나 큰 이야기가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보고, 만지고, 만나고, 느끼는 것이 장소성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요. 

숙영  오늘 양구의 아홉 번의 고지전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백마고지를 방문했던 기억이 떠올랐어요. 그 전에는 한 번도 관심을 갖지 못하다가 백마고지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슴이 많이 아팠던 기억이 있어요. 그것은 현장을 방문하지 않으면 가질 수 없는 기억이에요. 오늘 아홉 번의 고지전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전쟁의 참상이 치열하게 다가왔고, 인간이 전쟁을 통해 얼마나 비참해질 수 있는가를 새삼 직면한 것 같아요. 지금은 과거의 기록과 현재의 아름다운 자연만 보이잖아요. 그것이 오히려 대비되면서 평화에 대한 절실한 느낌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여기에 오지 않았다면 경험할 수 없는 것이라서 현장에 와서 보고 느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몸으로 느낀 하루였던 것 같아요. 하지만 안보 관광이라는 프레임 때문에 우리가 이름한 평화기행으로 생각이 잘 전환이 되지 않았어요. 여전히 내 안에 안보라는 프레임이 작동됨을 느꼈고, 어떻게 하면 그 프레임을 바꿀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되었어요.

기찬  저는 독일의 그뤼네스반트(Grünes Band)처럼 있는 그대로 놔두는 것이 필요하다고 봐요. 그런데 최근에 지방자치단체에서 철원 역사문화공원 근대거리를 만들고, 소이산에 모노레일을 설치했어요. 그리고 땅굴이나 전망대마다 모노레일을 건설 중인데, 저는 역사적 장소를 이렇게 놀이동산처럼 만드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요. 차라리 있는 그대로 놔두고, 트래킹 할 수 있도록 하면 좋을 것 같아요. 화천은 화천피스투어길, 양구는 양구피투어길, 인제는 인제피스투어길을 조성하여 많은 사람들이 순례하면서 지역사람들이 지역 이야기를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제일 좋지 않을까 싶어요. 그렇게 평화를 직접 이야기하기보다 사람들이 그냥 평화를 느낄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 주는 것이 더 낫다고 봐요.

유승  박수근 미술관에서 박수근 선생의 작가 노트에 적혀 있는 글을 하나 보았어요. 그것은 ‘소박’이라는 단어에 대한 정의를 적어놓은 것이었는데, 그 의미가 지금 이기찬 대표님이 말씀하신 것과 똑같아요. “소박 – 꾸미거나 거짓 없이 생긴 그대로임, 사람이 손을 대지 않은 그대로임” 펀치볼 둘레길을 걸으며 이 자체로 평화인데 다른 무엇이 더 필요한가라는 생각을 했어요. 무엇인가를 새롭게 만들어서 더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모습 그대로 보고 느끼게 하는 것이 소박이고, 평화인 것 같아요. 그렇게 된다면 사람들이 겉으로 표현을 하지 않더라도 아마도 마음에 점 하나씩을 찍고 가실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원피스투어가 추구하는 그러한 지향점에 저도 동의해요.

혁민  마무리 발언인 것 같은데, 전 이런 생각도 들어요. 인본주의를 떠나서 우리는 인간이니까 인간 없이는 장소도 없다는 생각이요. 그래서 장소의 평화적 전환이라고 하는 것은 장소가 그 자체로 우리에게 뭔가 주기를 기대하기보다는 인간인 우리가 가서 보고, 듣고, 말을 만들고, 오감으로 체험할 때 오히려 장소성이 발현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장소성의 발현! 너무나 멋진 표현에 모두가 한목소리로 환호했다. 장소성은 고정된 것도 아니고 거저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장소성이란 인간을 통해 만들어지기도 하고, 소멸되기도 한다. 장소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이기에, 우리의 장소를 보다 정의롭고, 안전하고, 뭇 생명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평화의 공간으로 만들어가야 할 책임 또한 있다. 양구는 한국전쟁 당시 여러 번의 치열한 고지전을 겪으며, 전쟁의 상흔이 여전히 남아있는 땅이지만, 그 전쟁의 기억을 평화의 기억으로 바꾸기 위한 시도들이 새롭게 시작되고 있다. 강원피스투어의 모토처럼 ‘DMZ를 평화롭고 즐거운 곳으로’ 만들어 갈 때, 분단 접경지대의 로컬리티는 안보담론에서 평화담론으로 자연스레 옮겨가게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또 다른 평화의 여정을 위해 다시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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