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집
기억하며 치유하는 광보네
글 장인희(담너머회복적정의 협동조합 이사장, 플랜P 편집위원)
“많은 사람이 편견 없이 우리의 아픈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해 주면 좋겠어.
시대의 아픔을 함께 이야기할 수 있을 때 치유가 된다고 믿어. 여기가 그런 공간이면 좋겠어”
바람이 많이 불던 잔뜩 흐린 날, 강광보 할아버지의 인생 이야기를 들었다.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그러나 자주 긴 숨을 쉬어가며 이어지는 그의 이야기가 믿겨 지지 않아서 자꾸만 얼굴이 일그러졌다. 제주시 도련동 주택가에 자리한 <수상한 집>에 대한 이야기는 4·3사건으로 시작된다.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통틀어 한국전쟁 다음으로 가장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한 참혹한 역사가 제주 4·3이다. 무려 7년간 지속되었던 4·3이 종료된 후에도 그 비극은 끝나지 않는다. 4·3과 관련된 자료들을 살펴보면 그 당시 제주 사회가 일본 특히 오사카의 한인사회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20년대 초반부터 정기적으로 제주-오사카 간 직항 선박이 운영되면서 제주인이 대거 이주해 오사카의 조선인 중 60퍼센트 이상이 제주 출신일 정도였다. 이들 중 상당수가 해방 직후 제주로 돌아오지만 4·3 와중에 일본으로 피한 수 또한 5천 명에서 1만 명 가까이 될 것으로 추산한다. 그 후로도 생계가 곤란했던 많은 이들이 일본의 친인척을 통해 건너갔고 이런 오사카 한인사회와의 관계는 1990년대까지도 많은 제주인이 4·3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굴레가 되기도 한다. 《4·3은 말한다 : 대하실록 제주민중운동사》
1962년 5월. 당시 22살이던 제주 청년 강광보는 먹고 살기 위해 일본으로 향한다. 오사카 이쿠노구에서 가방공장을 하던 큰아버지의 소개였다. 일본에 가서 백부와 백모가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소속이라는 것을 알았다. 초등학교 동창 모임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일본에는 제주 사람이 많았다. 대부분 4·3 때 생명의 위협을 느꼈거나 먹고 살기 위해 일본을 택한 사람들이었다. 그는 열심히 일해서 고향에 돈을 부치고, 결혼하여 아이들도 낳았다.
1979년, 일본에서 18년째 살던 해에 가족이 불법체류자로 적발된다. 강광보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선택한다. “일본에 그냥 살았으면 문제없었을 텐데, 왜 왔냐고 가족들한테 원망을 많이 들었지. 그래도 난 늘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었어. 후회는 안 해.”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그의 인생은 지금과 달랐을까?
제주공항에 도착하자 그를 맞이한 것은 중앙정보부 요원이었다. ‘붉은 물이 잔뜩 들어서 왔다’는 이유로 끌려가서 4일 만에 풀려났지만, 한 달 뒤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 아무래도 수상하다는 이유로 경찰서로 다시 불려 갔다. 사소한 일들까지 트집을 잡으며 65일 동안 엄청난 고문을 받았다. “말로는 다 표현이 안 될 만큼 힘든 시간이었지 뭐. 어느 날 세수하려고 나오는데,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기사가 떴지 뭐야.” 박정희 대통령 사망기사였다. 그렇게 고문도 구금도 중단되어 풀려났다. “나와서도 계속 감시를 당했고 친구나 친척을 만나면 보고하고 그렇게 몇 년을 지냈어.” 1985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자 강광보는 다시 보안대에 체포되었다. “45일을 창도 없는 캄캄한 지하에서 고문을 하는데, 말도 못해. 지난번 고문과는 비교가 안 되더라고. 정신을 몇 번 잃었는지 기억도 잘 안 나. 정신 차리면 손에 인주가 묻어 있고 그랬다니까. ”
1986년 그렇게 간첩으로 조작된 그는 7년 형을 선고받는다. “광주교도소에 갔더니 나 같은 제주 사람이 열 명은 되더라고. 데모하다 잡혀 온 젊은 사람들이 응원도 해주고 그랬지. 학교 다니는 것 같은 기분으로 지냈던 것 같아. 시간이 많으니까, 책도 많이 읽고 여러 가지를 알게 되었지.” 강광보의 나이 45세, 7년을 감옥에서 지내며 그는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1991년 출소하여 제주로 돌아왔지만, 그는 혼자였다. 가족들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들은 못 본 지 삼십 년은 넘은 것 같아. 아마 가족들도 많이 시달리고 고통 받았겠지. 날 받아주거나 하는 건 바라지 않아. 그저 잘 살기만을 바랄 뿐이지 ”
2009년 무릎 수술을 하고 야간 경비원으로 지내던 그는, 우연히 TV를 보다가 재심을 신청하기로 마음먹는다. 제주에 있는 사람들을 설득해서 7명이 함께 신청했다. 2017년 강광보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30년의 세월이 지난 후였다. “무죄가 확정되고 보상금을 받긴 했지만, 아직까지 제대로 된 사과를 받은 적은 없어.” 국가에서는 “당신들이 시대를 잘못 태어났다고만 하더라고.” -중략-
수상한 집
기억하며 치유하는 광보네
글 장인희(담너머회복적정의 협동조합 이사장, 플랜P 편집위원)
“많은 사람이 편견 없이 우리의 아픈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해 주면 좋겠어.
시대의 아픔을 함께 이야기할 수 있을 때 치유가 된다고 믿어. 여기가 그런 공간이면 좋겠어”
바람이 많이 불던 잔뜩 흐린 날, 강광보 할아버지의 인생 이야기를 들었다.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그러나 자주 긴 숨을 쉬어가며 이어지는 그의 이야기가 믿겨 지지 않아서 자꾸만 얼굴이 일그러졌다. 제주시 도련동 주택가에 자리한 <수상한 집>에 대한 이야기는 4·3사건으로 시작된다.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통틀어 한국전쟁 다음으로 가장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한 참혹한 역사가 제주 4·3이다. 무려 7년간 지속되었던 4·3이 종료된 후에도 그 비극은 끝나지 않는다. 4·3과 관련된 자료들을 살펴보면 그 당시 제주 사회가 일본 특히 오사카의 한인사회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20년대 초반부터 정기적으로 제주-오사카 간 직항 선박이 운영되면서 제주인이 대거 이주해 오사카의 조선인 중 60퍼센트 이상이 제주 출신일 정도였다. 이들 중 상당수가 해방 직후 제주로 돌아오지만 4·3 와중에 일본으로 피한 수 또한 5천 명에서 1만 명 가까이 될 것으로 추산한다. 그 후로도 생계가 곤란했던 많은 이들이 일본의 친인척을 통해 건너갔고 이런 오사카 한인사회와의 관계는 1990년대까지도 많은 제주인이 4·3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굴레가 되기도 한다. 《4·3은 말한다 : 대하실록 제주민중운동사》
1962년 5월. 당시 22살이던 제주 청년 강광보는 먹고 살기 위해 일본으로 향한다. 오사카 이쿠노구에서 가방공장을 하던 큰아버지의 소개였다. 일본에 가서 백부와 백모가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소속이라는 것을 알았다. 초등학교 동창 모임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일본에는 제주 사람이 많았다. 대부분 4·3 때 생명의 위협을 느꼈거나 먹고 살기 위해 일본을 택한 사람들이었다. 그는 열심히 일해서 고향에 돈을 부치고, 결혼하여 아이들도 낳았다.
1979년, 일본에서 18년째 살던 해에 가족이 불법체류자로 적발된다. 강광보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선택한다. “일본에 그냥 살았으면 문제없었을 텐데, 왜 왔냐고 가족들한테 원망을 많이 들었지. 그래도 난 늘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었어. 후회는 안 해.”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그의 인생은 지금과 달랐을까?
제주공항에 도착하자 그를 맞이한 것은 중앙정보부 요원이었다. ‘붉은 물이 잔뜩 들어서 왔다’는 이유로 끌려가서 4일 만에 풀려났지만, 한 달 뒤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 아무래도 수상하다는 이유로 경찰서로 다시 불려 갔다. 사소한 일들까지 트집을 잡으며 65일 동안 엄청난 고문을 받았다. “말로는 다 표현이 안 될 만큼 힘든 시간이었지 뭐. 어느 날 세수하려고 나오는데,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기사가 떴지 뭐야.” 박정희 대통령 사망기사였다. 그렇게 고문도 구금도 중단되어 풀려났다. “나와서도 계속 감시를 당했고 친구나 친척을 만나면 보고하고 그렇게 몇 년을 지냈어.” 1985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자 강광보는 다시 보안대에 체포되었다. “45일을 창도 없는 캄캄한 지하에서 고문을 하는데, 말도 못해. 지난번 고문과는 비교가 안 되더라고. 정신을 몇 번 잃었는지 기억도 잘 안 나. 정신 차리면 손에 인주가 묻어 있고 그랬다니까. ”
1986년 그렇게 간첩으로 조작된 그는 7년 형을 선고받는다. “광주교도소에 갔더니 나 같은 제주 사람이 열 명은 되더라고. 데모하다 잡혀 온 젊은 사람들이 응원도 해주고 그랬지. 학교 다니는 것 같은 기분으로 지냈던 것 같아. 시간이 많으니까, 책도 많이 읽고 여러 가지를 알게 되었지.” 강광보의 나이 45세, 7년을 감옥에서 지내며 그는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1991년 출소하여 제주로 돌아왔지만, 그는 혼자였다. 가족들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들은 못 본 지 삼십 년은 넘은 것 같아. 아마 가족들도 많이 시달리고 고통 받았겠지. 날 받아주거나 하는 건 바라지 않아. 그저 잘 살기만을 바랄 뿐이지 ”
2009년 무릎 수술을 하고 야간 경비원으로 지내던 그는, 우연히 TV를 보다가 재심을 신청하기로 마음먹는다. 제주에 있는 사람들을 설득해서 7명이 함께 신청했다. 2017년 강광보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30년의 세월이 지난 후였다. “무죄가 확정되고 보상금을 받긴 했지만, 아직까지 제대로 된 사과를 받은 적은 없어.” 국가에서는 “당신들이 시대를 잘못 태어났다고만 하더라고.” -중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