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호/2022.06][전문공개/P-word특집] 평화다원주의의 길

평화저널 플랜P
2022-06-20


이찬수(보훈교육연구원)

1. 평화문맹의 시대

평화라는 말은 넘쳐나지만, 세상은 평화롭지 않다. 많은 이가 평화를 원하며 각종 말을 쏟아놓는데도 그렇다. 정서적, 기질적, 경제적인 조건 등등이 맞아 일정 기간 평화를 누리는 개인이나 소집단이 있기는 하지만, 전래 동화 속 신화적인 이야기를 제외하면 사회 또는 세계 전체가 평화로웠던 적은 없다. 왜일까. 

여러 이유가 있지만, 지면이 제한된 이 글에서는 사람들의 평화에 대한 인식 및 이해의 다양성과 상이성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평화 실천의 내적 이유와 의도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평화에 대한 상이한 이해와 저마다의 숨은 목적에 기반한 실천이 도리어 긴장을 지속시키고, 갈등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에 대해 정리할 것이다. 평화에 대해 무관심할뿐더러 평화조차 자기중심적으로 판단하고 도모하려는 이른바 ‘평화문맹’이 폭력을 유발하고 정당화시키는 모순적 현실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평화다원주의’(pluralism of peaces)와 연결시킬 것이다. 후반부에 다시 제시하겠지만, 평화다원주의는 평화의 개념, 이유, 이해 등이 다양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다양한 평화들(peaces) 간 조화를 추구하면서, 다수가 동의할 상위의 가치, ‘더 큰 평화’ 혹은 ‘대문자 평화’(Peace)를 추구해가는 과정적 자세이다. 그렇다면 평화란 무엇인지 그 기본적인 개념부터 알아보자. 


2. 평화라는 말의 심층

흔히 ‘평화는 폭력이 없는 상태’라고 정의한다. 그러면 폭력은 무엇인가. 폭력의 한자상의 의미는 ‘사납고 지나친[暴] 힘[力]’이다. 영어 violence는 ‘힘(vis)의 위반(violo)’이라는 어원적 의미를 지닌다. 폭력은 정도가 지나쳐 피해를 주거나 파괴를 수반하는 힘이다. 이는 기존 힘의 질서의 위반이다. 이때 정도가 지나치다거나 위반했다고 판단하는 주체는 기본적으로 그 사나운 힘이 향하고 있는 대상자이다. 성폭력의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성폭력 피해자에게 있듯이, 폭력을 판단하는 기준은 그 지나친 힘이 향하고 있는 대상이다. 그 대상자가 폭력을 폭로하고 다함께 그런 폭력이 더 벌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평화구축의 관건이다. 

그런데 그것은 대단히 어렵다. 왜 그런 폭력이 벌어졌는지 그 근본 원인을 따져 들어가다 보면 저마다, 심지어는 가해자로 여겨지는 이들에게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들도 나름대로 각종 폭력에 시달려온 경우가 다반사이다. 평화를 설명하고 규정하려면 이러한 근본적이고 입체적인 현실을 두루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평화보다 앞서 있는 폭력적 현실을 인정하고 직시하고 맞닥뜨려야 한다. 

인류는 평화보다 폭력을 훨씬 더 현실적으로 느끼고 있다. ‘평화는 전쟁이 없는 상태 혹은 전쟁이 그친 상태’라는 규정은 인류는 전쟁의 경험을 더 크게 해오고 있다는 뜻이다. ‘평화는 일체의 갈등이 해소되었거나 없는 상태’라는 정의도 그렇다. 인류는 어제도 오늘도 다양한 갈등을 경험해오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자연스럽게 알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평화는 폭력이 없는 상태’라거나 ‘평화는 전쟁은 물론 일체의 갈등마저 없는 상태’라는 식의 정의는 비현실적이거나 지나치게 이상적이라는 것이다. 평화를 이야기하다 보면 폭력의 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직시하면서 좀 더 현실감 있는 정의를 내려보자. 


3. 평화는 부정성의 축소

평화학자 요한 갈퉁(Johan Galtung)은 평화를 ‘전쟁과 같은 물리적 폭력은 물론, 억압적 정치 시스템에 따른 구조적 폭력, 나아가 성차별이나 생태적 차별 같은 문화적 폭력마저 없는 상태’라고 규정한 바 있다. 다른 곳에서는 “평화=공평×조화/상처×갈등”으로 간명하게 도식화하기도 했다. 이 가운데 후자의 경우는 공평과 조화라는 긍정성(분자)이 커질수록, 그리고 상처와 갈등이라는 부정성(분모)이 줄어들수록 평화가 커진다는 간결한 의미를 담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평화를 설명하는 공정한 도식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현실에서는 분자와 분모가 대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평과 조화(분자)는 그 자체가 독립적인 가치나 상태라기보다는 현실에서 불공평과 부조화(분모)라는 부정적 가치가 축소되는 만큼 경험되는 종속적 상태에 가깝다. 인간이 경험하는 긍정성은 선행하는 부정적 경험을 전제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기쁨도 별반 기쁘지 않았던 기존의 상태와의 차이로 경험된다. 마찬가지로 공평은 기존의 불공평이 일정 부분 개선되는 형태로 경험된다. 긍정성의 경험은 기존의 비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상태와의 차이를 경험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갈퉁은 분자와 분모를 다 중시했지만, 이 중에 더 중요한 것은 분모이다. 분자와 분모는 등가적이지 않다. 상처와 갈등이라는 부정적 경험치를 축소해가는 만큼 평화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평화를 규명하는 데 폭력을 가져올 수밖에 없는 현실은 평화연구의 역설을 보여준다. 평화의 개념이 비평화, 즉 폭력, 전쟁, 갈등 등의 개념에 의해 한정된다는 사실은 평화 연구의 난제를 담고 있다. 평화 아닌 것으로 평화를 설명해야 하는 모순적 상황에서 평화라는 것을 과연 제대로 설명할 수 있기나 한 것일까. 과연 평화는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일까. 바로 이런 근본적인 물음에 직면하게 되기 때문이다.


4. 평화는 정의인가

이것은 평화를 긍정적 언어, 가령 ‘정의’로 설명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세속적 차원의 평화론에 의구심을 품고서 보편적이고 절대적으로 통용되는 새로운 평화개념을 발전시켰다. 그는 평화(pax)를 ‘질서의 고요함’으로, 질서(ordinatio)는 ‘동등한 것과 동등하지 않은 것들을 각각 제 자리에 앉히는 배치’로 파악했다. 그리고 세계 질서 내에서 모든 사물에 그에 걸맞은 올바른 자리를 배정하는 능력과 의지를 ‘정의(justitia)’로 규정하면서, 평화를 정의와 연결시켰다. 이런 사상적 흐름은 토마스 아퀴나스에게로 이어지면서, 유럽에서는 파편적이고 일시적인 평화가 아니라 완전하고 영원한 평화개념을 상상하는 분위기가 커졌다. 평화를 도덕적이고 우주적 가치의 차원에서 해설하는 흐름이 생긴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20세기의 문헌인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에서 ‘평화는 정의(正義)의 실현’이라는 규정으로 이어졌다. 이 문헌에서는 ‘완전한 정의를 갈망하는 인간들이 실현해야 할 질서(정의)의 현실화가 바로 평화’라며 지극히 이상적인 언어를 써서 평화에 대해 설명한 바 있다. 

그래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전술했듯이 서양에서 정의란 올바른 질서의 원칙 혹은 질서의 유지 및 생성을 위한 도덕적인 행동방식이었다. 정의가 개인 간의, 또는 사회의 올바른 질서의 문제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질서가 잡히려면, 다시 말해 비평화적 상황을 조정하고 방지하려면, ‘법’은 물론 법의 적절한 운용으로서의 ‘정치’가 필요하다. 이때 법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고, 아래로부터 한 사람 한 사람이 합의해서 만들어 낸 것도 아니었다. 사실상 법의 원천은 거대한 폭력이라 할 만한 어떤 힘과 연결되어 있다. 법이라는 것은 기존의 여러 힘들을 제압한 어떤 압도적인 힘이 제안한 뒤, 그 힘을 권력으로 정당화시켜 주는 장치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다 보니 실제로 서양 중세에서는 법의 유효성과 평화가 동일시되었고, 법의 파괴는 평화의 파괴였다. 평화가 확립되는 것과 재판소가 설립되는 것은 궤를 같이했다. 사회적 평화가 위로부터 만들어져 주어진 법과 사실상 동일시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법은 질서 유지를 위해 강제력을 수반하는 사회적 규범이라는 점에서 아무리 평화를 규정하기 위해 정의와 같은 평화에 가까운 어떤 개념이나 자세를 가져온다 해도, 결국은 비평화적인 어떤 것으로 평화를 규정해야 하는 모순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뜻이다. 

그 자체로서의 평화라는 것은 없다. 평화는 무한할 정도로 다양한 개념들에 의해 지시되는 어떤 상태이되 ‘평화는 ~이 없는 상태’라는 규정에 담긴 ‘상태’까지 설명하다 보면 상황은 더욱 복잡하게 꼬이면서 다시 새로운 차원으로 연결된다. 


5. 평화는 술어다

여기서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분명한 논리적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주어가 술어에 의해 한정되면서 성립된다는 것이다. 주어는 언제나 술어에 의해 한정되고 규정된다. 주어는 무한할 정도의 다양한 술어들에 의해 끝없이 지시된다. 만일 평화를 주어로 ‘평화란 ~이다’라며 평화에 대해 무언가 설명한다고 할 때, 사실상 드러나는 것은 평화가 아니라 평화를 지시하는 술어들의 세계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비평화적 현실들이다. 

이것은 모든 주어들의 운명이다. 주어의 영어식 표현인 subject는 ‘아래에(sub) 놓인다(ject)’는 뜻이다. 주어는 술어 아래 놓임으로써만 의미가 발생한다. 주어는 사실상 술어에 대해 종속적이다. 이것이 주어에 해당하는 영어 subject가 ‘~에 종속적인’이라는 의미도 동시에 지니는 이유다. 주어는 한 문장의 주체나 중심이 아니다. 도리어 술어에 의해 지시되어야 살아나는 종속적 존재다. 

주어가 종속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누구나 주어를 해명할 때 자신에게 더 익숙한 경험적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술어가 말하는 이와 듣는 이 모두의 경험에 더 가까운 언어라는 뜻이다. 주어와 술어는 동일하지 않다. 그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이다’는 동일률의 형식을 하고 있지만, 주어는 언제나 차이에 의해 규정된다. 그런 점에서 엄밀하게 말하면 ‘~이다’는 불가능하다. 주어는 끝없는 차이들에 도전받고 그에 종속되는 과정으로 존재한다. 주어는 술어들에 의해 지시되는 만큼만 주어라는 뜻이다. 마찬가지의 논리로 평화는 폭력 혹은 비평화적인 상태나 개념들에 의해 규정되는 만큼만 평화다. 이것이 술어를 중시해야 하는 이유,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주어와 술어의 차이를 중시해야 하는 이유다. 

이 술어적 차이를 인식하면서 주어도 인식된다. 이것은 차이의 정도가 다르거나 차이에 대한 인식 혹은 경험치가 다르면, 주어도 달라지거나 다르게 인식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평화라는 이름으로 왜 평화 아닌 상황, 즉 비평화적 상황이 발생하는지 그 근본적인 이유를 잘 보여 준다. 저마다 평화에 대해 말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이의 평화에 대한 술어적 표현들이 다양하고, 술어로 해설된 만큼만 주어로서의 평화가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실에서는 평화도 다양한 양상으로 존재한다. 


6. 복수를 인정하며 단수를 찾아간다

가족이라도 각기 경험들이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은 것처럼, 평화의 개념도 단수적이기보다 복수적이다. 실제로는 여러 가지 ‘평화들’이 있는 것이다. 평화가 시각, 청각, 촉각과 같은 감각기관과 연루된 경험의 영역이라면 더욱이나 그렇다. 평화는 복수로 이해해야 하며, ‘평화’와 ‘평화들’을 구분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중대한 과제는 ‘평화들’의 세계에서 결국은 ‘평화’를 확보해가는 것이다. 인식적 다양성 속에서 다양함들의 조화를 찾아내는 것이다. 평화를 확보하려면, 인간이 다양하게 경험하는 ‘평화들’을 긍정하고 이들의 관계성을 중시하면서, 대화를 통해 ‘평화’로 여겨지는 것을 도출해내야 한다. 합의를 통해 다양한 평화 인식과 경험들 사이에 공유의 지점을 찾아 나가야 한다. 

대화를 시도한다는 것은 다양한 평화 경험들 간에 공감과 공유의 지점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부분적일지언정 상대방의 언어에 대한 공감과 저마다 제한된 이해들 간 합의의 가능성을 전제하는 것이다. 이는 공감 혹은 합의의 가능성에 대한 선이해가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선행적 공감의 영역을 중시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하버마스(J. Habermas)가 공론의 장에서 합의를 중시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합의는 제한된 인식이나 이해들이 파편적으로 흩어지지 않고 공통의 영역을 확보해가는 과정이자, 대화를 시작할 때 전제되었던 선행적 공통 지점을 확인해가는 사건이다. 

물론 합의는 간단한 일이 아니다. 하버마스도 여론이 집결되는 ‘공론의 장’은 대화, 토론, 합의를 통해 형성된다고 강조한다. 그 과정에 제도적 기득권을 누리는 정치 권력의 부당한 개입이나 여론을 수단 삼아 스스로를 부각시키려는 압력단체나 언론매체들의 욕구들이 있을 수 있고, 그로 인해 공정한 여론의 형성이 힘들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압을 일시적으로 분출하는 폭력적 혁명보다 여러 의견들이 오가는 생활세계의 의사소통 과정이 민주주의의 든든한 기반을 만들어준다고 주장한다. 가시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지만, 지속적 합의를 통해 생활세계에서 공감의 영역을 확보해가는 과정이 가능하며 또 요청된다는 것이다. 


7. 평화는 다원주의적이다

마찬가지의 논리로 평화에 대한 인식의 다양성을 긍정하되, 다양한 인식들 간에 공감대를 찾는 일은 평화를 구현하려는 이들의 불가피한 과제다. 클래식이나 팝이나 대중가요가 모두 음악이듯이 음악은 하나의 유형일 뿐 실제로는 다양한 장르로 구성되고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평화들’이 ‘평화’인 이유도 평화들의 공감대가 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평화들’의 형태로 나타나기에, 다양한 맥락에 처한 인간의 평화 경험과 기대 사이에 대화를 통한 합의의 과정을 늘 견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특정한 평화 경험을 전체의 평화를 위한 유일한 기준으로 삼는 것은 위험하다. 그렇게 하다 보면 평화가 다른 이에게는 폭력으로 작용할 수 있게 된다. ‘클래식’만 음악인 것이 아니라 ‘락’도 ‘랩’도 음악이듯이, 특정한 평화 경험을 객관화하는 것은 위험하다. 이러한 위험은 평화를 정의의 구현으로 간주하고서 정의를 추구하려 할 때도 개입될 수 있다. 가령 정의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법이 개입하는 경우, 법의 영역 ‘안’에 있는 이들에게는 정의가 평화일 수 있지만, 영역 ‘밖’에 있는 이들에게는 평화가 소외와 배제일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평화의 이름으로 평화들이 갈등의 진원지가 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평화들 간의 거리가 ‘문’이 아니라 ‘벽’이 되는 순간, 평화라는 이름의 갈등과 폭력이 발생한다. 

평화는 일방적일 수 없다. 평화는 쌍방적, 나아가 복합적이며, 조화롭다. 그 조화의 한복판에 공감대로서의 평화가 있다. 평화의 형태는 다양할 수 있지만, 다양한 형태들 간의 공감대 때문에 형태적 다양성이 갈등으로 이어지지 않거나 덜 이어지게 된다. 평화를 기반으로 다양한 평화들을 긍정하고, 이 ‘평화들’이 ‘평화’를 지시하는 다양한 술어들이라고 인정하는 논리가 ‘평화다원주의(pluralism of peaces)’다. 

평화다원주의는 단순히 평화들이 여럿이라는 중립적인 주장이 아니다. 평화다원주의는 복수의 ‘평화들’이 인식적이든, 도덕적이든, 사회적이든, 정치적이든, ‘평화’라는 공감대 안에서 유기적 연계와 통합이 가능하다고 여기는 입장이다. ‘평화’를 설명하는 다양한 술어들에게서 ‘평화들’의 세계를 보면서 평화의 유기적 통합력(organic integrative power of peace)까지 읽어 낼 줄 아는 자세다. ‘평화들’이 서로에게 갈등의 원인을 제공할 가능성도 있지만, 이 평화들도 결국 ‘평화’의 유기적 통합력 안에 있기에 공감의 영역을 떠나지 않게 되리라고 보는 긍정적 입장이다. 그 공감대로서의 평화를 전제하고 상상하면서, 평화에 대한 다양한 논의와 평화의 다양한 형태들이 정당성을 얻어간다고 보기 때문이다. 


8. 평화는 감폭력이다

물론 평화다원주의도 하나의 인식론적인 개념으로서, 인식이 다양한 만큼 평화를 다원주의적 시각에서 판단하는 입장 역시 상대성을 면치 못한다. 평화에 대한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기준이 없듯이 평화다원주의를 그 자체로 절대적 기준으로 삼는 행위는 위험하다. ‘~주의’는 언제나 상대적이며 절대적 기준을 내포하지 않고 내포할 수도 없다. 

이때 평화다원주의가 인식론적 상대주의에 갇히지 않고 실제로 평화의 구체화에 공헌할 수 있으려면, 평화들이 여럿이라고 주장하는 단계를 넘어 실제로 평화들의 다양성을 수용해야 한다. 평화들에 대한 인식적 다양성을 머리로 인정하는 단계로부터 마음으로 수용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중심적 인식의 우월성을 내려놓고, 그 안에 타자의 세계관을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럴 때 갈등이 해소되고, 평화에 관한 다양한 입장들이 살아있는 평화가 된다. 평화는 어떤 하나의 주장이나 입장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입장들의 조화와 상호 공유를 통해서만 존재하는 과정인 것이다. 

나아가 동의하고 수용하는 그 지점의 성격과 내용도 살펴야 한다. 무엇보다 그 지점이 폭력을 줄이는 지점인지 성찰해야 한다. 평화가 다원주의적이라지만 무작정 상대주의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동의하고 수용하되, 그 동의와 수용이 누군가의 원치 않는 고통을 줄이고 그로 인해 미소를 되살려 낼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물론 그 지점은 단순히 특정 개인의 자기희생적 결단만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그 지점의 성격에 대한 공감과 합의가 요청된다. 평화는 특정 입장이나 사건에 제한되지 않으며, 사람들의 지속적인 추구의 대상이라는 공감적 인식이다. 그런 점에서 평화는 어느 정도 목적론적이다. 평화는 현재 완료형이기보다는, 폭력이 사라지기를 꿈꾸는 기대와 실천만큼 현재 안에 구현되는 과정적 실재라는 것이다. 

평화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평화는 하나의 연구대상이기도 하지만, 평화가 하나의 대상에 머문다면 그것은 하나의 관념일 뿐이다. 평화는 평화들을 수용하는 행위를 통해 살아난다. 그 수용이 상대적 ‘평화들’을 공통적 ‘평화’로 생생하게 재구성시키는 근거다. 그 공통적 평화조차 더 큰 상위의 혹은 심층의 평화, ‘대문자 평화(Peace)’에 개방적이어야 한다. 이렇게 평화는 서로에 대해 공감하고 합의하고 수용해 가는 과정이지, 제삼의 영역에 자리 잡고 있는 공상적 유토피아가 아니다. 

평화는 현재 완료형이 아니라는 개방적이고 겸손한 입장을 견지하지 못하거나 평화들이 만나는 공통의 지점 내지 공감대를 확보하지 못한다면, 평화의 이름으로 폭력이 발생한다. 칸트가 인간성을 수단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듯이, 상대의 평화를 수단화하는 과정이 폭력이다. 평화는 평화들의 다양성과 상대성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행위를 통해서 드러난다. 나의 평화 경험이 너의 경험과 교류해야 하고, 평화연구가 학제적으로 융합되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교류하고 공유하지 않는 평화는 없다. 

이러한 기대와 희망에 근거해 폭력을 줄여나간다면, 그 폭력의 축소가 바로 평화의 과정적 모습이다. 평화보다 폭력의 경험이 더 큰 인류에게 평화라는 것은 언제나 폭력이 축소되는 형태로 드러난다. 한 마디로 ‘평화는 감폭력(減暴力)의 과정’이다. 평화는 완성된 하나의 상태가 아니라, ‘폭력이 줄어드는 과정 혹은 폭력을 줄이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왜 폭력을 줄여야 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는 폭력에 의한 아픔과 희생에 대한 공감이 들어있다. 


9. 공감이 동력이다 

폭력을 줄여나가는 그 비폭력적 동력 중 하나는 ‘공감’(共感)이다. 공감은 사람들이 사회를 이루며 함께 살아가기 위한 근본적인 능력 가운데 하나다. 평화의 가능성에 대한 탐구에서 제외시킬 수 없는 영역이다. ‘함께[共] 느낌[感]’ 혹은 ‘느낌[感]의 공유[共]’라 요약할 수 있다. 누군가와 무엇인가를 함께 느끼고 있는 상태가 공감이다. 이때 핵심은 ‘함께’에 있다. ‘함께 느낀다’지만, 여기에도 타자의 형편을 먼저 떠올리며 타자에게 나아가는 타자지향적 공감(empathy)과 타자가 자신의 느낌에 맞추어주기를 바라는 자기중심적 공감(sympathy)이 있다. 자기중심적 공감은 타자를 배제하고 결국 폭력에 공헌할 가능성이 있다. 타자지향적 공감, 가령 붓다의 자비, 맹자의 측은지심, 예수의 긍휼같은 공감력이 평화의 기초이자 동력이다. “중생이 아프니 내가 아프다.”(《유마경》 <문수사리문질품>)고 한 유마거사의 일성은 타자의 아픔에 대한 공감의 전형적인 사례다. 이러한 공감이 폭력을 축소하고 평화를 구축하는 근간이 된다. 공감으로 인해 나와 너, 사회 전체가 생명력을 얻어가고 그만큼 평화로워진다. 

물론 평화가 폭력을 줄여가는 과정이라고 할 때, 그 폭력이 줄어드는 경험을 하는 주체는 자기 자신이다. 그래서 평화의 근간은 개인의 평화, 특히 내면의 평화다. 그렇지만 폭력이 구조적이고 복합적인 성격을 띠며 타자가 그 누구라도 폭력으로 고통당하고 있다면, 결코 개인만의 평화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사회적 평화 없는 개인의 평화란 불가능하다. 사회성이 결여된 개인의 평화는 결국 부메랑이 되어 개인의 평화를 침식한다. 그리고 개인의 평화를 희생시킨 사회적 평화란 모래 위의 집보다 위태하다. 이는 언어도단이자 폭력이다. 평화학에서 말하는 평화는 개인을 살리면서 공적 영역을 열어 주는 평화, 공공철학자 김태창의 언어로 하면 ‘활사개공(活私開公)’의 평화여야 한다.

평화는 ‘타자지향적 공감’으로 인해 확보되고 확장된다. 공적 기구의 개입이나 당사자들의 합의과정을 법으로 강제하기 이전에 어떤 상황이나 사태에 대한 공감적 인식이 더 근본적이다. 공감적 인식, 특히 타자지향적 공감에서만 개입과 합의가 인간의 얼굴을 하게 되고, 다름의 공존, 타자와의 공생이 확보된다. 평화가 집단과 국가 간 조약에 근거하고 법적 통제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 여전한 현실이고, 그것이 평화조성(peace-making)의 긴요한 과정이지만, 인간이 조약에 종속되는 한, 인간은 평화의 주체라 할 수 없다. 그곳에 인간의 얼굴은 없거나 희미하다. 법적 견제나 법적 조항문의 강제성을 넘어 인간의 기초적인 능력과 가치인 ‘공감의 네트워크’를 형성해 가야 한다. 그럴 때 평화가 구축(peace-building)되어간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평화다원주의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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