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호/2021.09][전문공개/P-word특집] 9.11 20주년,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배울 것인가?

평화저널 플랜P
2021-09-28


글 / 이인엽

 미국 버지니아주 워싱턴 & 리 대학교(Washington and Lee University) 정치학과 교수

 


들어가며

9.11 20주년이 되었다. 충격적인 그날의 사건은, 미국과 전 세계에 어떤 파장을 가져왔는가? 9.11로부터 본격화된 미국의 중동 군사개입은 아프간 전쟁, 이라크 전쟁, 시리아 내전, 이슬람국가IS의 발흥과 몰락, 중동 난민 사태, 그리고 최근의 미군 아프간 철군과 탈레반의 재집권까지 연쇄 작용을 하며 이어져 왔다. 지난 20년의 사건들을 정리해 보고, 9.11과 이후 역사에서 우리가 무엇을 기억하고 배워야 할지 이야기해 보려 한다.


1. 알 카에다와 빈 라덴

9.11을 이해하려면 그 기원이 되는 1980년대 미국의 아프간 비밀 작전을 알아야 한다. 1919년 영국의 식민지배에서 독립한 아프간은 온건 이슬람 국가로 서구화를 진행하며 비교적 안정된 상태였으나, 1970년대 들어와서 공화주의, 공산주의, 근본주의 이슬람 등 복잡한 정치 세력들이 각축을 벌였다, 결국 급진 공산주의 세력이 집권하게 되고, 이들은 다시 근본주의 이슬람과 대립한다. 그러자 1979년 12월에 소련은 국경을 접한 아프간을 통제하기 위해 전면적인 군사개입을 감행한다. 이후 소련은 아프간과의 전쟁에서 10년의 악몽을 경험하고서야 1989년에 아무런 소득 없이 철수하는데, 이는 1991년 소련 붕괴의 한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아프간과의 전쟁에서 소련이 고전한 이유는, 아프간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인 무자헤딘 게릴라들을 미국이 비밀리에 지원했기 때문이다. 카터 정부는 소련의 아프간 개입이 미국의 중동 석유 패권을 위협하려는 첫걸음으로 이해하고, 미국의 국익을 위해 이를 반드시 막아야 한다는 내용의 ‘카터 독트린(1980)’을 발표한다. 동시에 미국은 강대국 소련이 약소국 아프간을 침공했다고 격렬히 비난하며, 아프간에 대하여 ‘사이클론 작전’이라는 비밀 군사개입을 시작한다. 그런데 카터 정부의 핵심이었던 국가안보 보좌관 브레진스키는 1998년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무자헤딘을 지원하는 미국의 비밀 작전은 소련의 아프간 침공에 대한 대응으로서가 아니라 소련의 침공 직전에 이미 시작되었다고 밝혔다. 그것은 소련의 아프간 침공을 유도해 과거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경험했던 것과 같은 수렁을 소련에게도 안겨주기 위해서 계획된 것이었다고 폭로했다. 결국 미국의 모든 관심은 냉전 승리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1980년 말, 미국 대선에서 ‘냉전의 전사’ 레이건이 당선됨에 따라 아프간에 대한 미국의 비밀 개입은 더욱 심화된다. 미국은 인접한 파키스탄의 정보국 ISI와 협력하여 아프간의 무자헤딘 게릴라들에게 무기와 군사 훈련을 제공한다. 또한 무신론의 공산주의 소련과 싸우는 이슬람 형제들을 돕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사우디를 비롯한 전 세계 이슬람 국가들을 연결해 막대한 돈과 인력을 아프간으로 끌어들였다.

이처럼 놀랍게도 근대 역사 최초의 ‘글로벌 이슬람 지하드 운동’은 바로 ‘미국’의 후원으로 조직된 것이다. 미국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게 무기와 군사 훈련을 제공해서 나중에는 자신들도 통제할 수 없는 하나의 ‘괴물’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볼 때, 9.11 이후 부상한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이 이슬람의 종교와 문화를 세계 갈등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는 것은 그 논리가 얼마나 단순하며 역사를 무시하고 있는 것인지 쉽게 알 수 있다. 국제 갈등을 문명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그 이론은, 과거 미국의 군사개입이나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의 일방적 지지에 따른 팔레스타인 문제, 중동의 석유와 관련된 미국의 패권, 독재 정부와 미국의 유착 관계 등을 모두 간과하게 만든다. 파키스탄의 여성 총리였던 부토는 미국의 후원하에 파키스탄 정보국이 정부도 통제할 수 없는 무소불위의 집단이 되어가는 것과 이슬람 극단주의가 확대되는 것을 우려해, 1989년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아버지 조지 부시에게 “당신들은 프랑켄슈타인을 만들어 내고 있다”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 역시 그러한 길항 관계의 희생양이 되어 2007년 이슬람 극단주의자의 테러로 사망했다.

여하간 미국의 사이클론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미국이 무자헤딘에 제공한 대공 화기인 스팅어 미사일 등이 소련 헬기와 전투기들을 무수히 격추했고, 이들의 게릴라 전술에 소련은 막대한 인명과 재정의 손실을 입고 굴욕적으로 아프간에서 철군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우디 출신의 이슬람 전사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오사마 빈 라덴이다. 사우디 재벌 빈 라덴 가문 출신인 그는 지하드 전사가 되어 아프간에서 파키스탄의 정보국, 무자헤딘과 함께 소련과 싸워 승리한다. 그러나 이후 걸프전(1990~91)이 시작되고, 미군이 이슬람 성지 사우디에 영구 주둔하며, 미국의 친이스라엘 정책으로 팔레스타인이 고통받는 것을 지켜보면서, 빈 라덴은 그 자신이 반미주의자가 되어 ‘알 카에다’를 창설하기에 이른다. 이어 소련의 철군으로 미국 역시 아프간에 대한 관심을 잃어가는 가운데, 무자헤딘 간의 내전이 벌어지고 여기서 승리한 근본주의 이슬람 세력 ‘탈레반’이 아프간을 장악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이 보여주는 것은 결국 이들이 1980년대 미국이 주도한 아프간 비밀 작전의 부산물이며, 한때 소련이라는 적을 두고 함께 싸웠던 전우들이라는 사실이다. 빈 라덴을 포함한 9.11 테러범의 90%가 사우디 출신이고, 9.11 이후에 탈레반이 빈 라덴을 보호한 것, 그리고 빈 라덴이 파키스탄의 수도 근처인 아보타바드에 5년 이상 숨어 있다가(아마도 파키스탄 내의 협력 세력에 의해 보호받다가) 사살된 배경은 이러한 사실을 알아야만 이해할 수 있다.

9.11 이후 조지 부시나 새뮤얼 헌팅턴 등은 문명충돌론을 토대로 9.11을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미국의 문화와 체제를 증오해서 벌인 사건으로 정의했으나, 《블로우백》을 쓴 찰머스 존슨은 9.11은 미국이 과거에 벌인 비밀 군사개입이 ‘부메랑’처럼 돌아온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빈 라덴은 파나마의 노리에가나 이라크의 후세인처럼, 한때 미국의 가까운 협조자로 있다가 적이 된 인물들 중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나 9.11 이후 미국은 과거 역사를 성찰하기보다 애국주의의 광풍에 휩싸여 이슬람이나 테러리스트를 절대 악으로 규정하고, 테러에 대한 공포심을 부추겨 ‘대테러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엄청난 규모의 군사개입을 시작한다.

 

2. 아프간 전쟁(2001~2021), 그리고 이라크 전쟁(2003~2011)

빈 라덴을 넘기라는 미국의 요구를 탈레반이 거부하자, 미국은 2001년 10월 초 아프간 전쟁을 시작한다. 이는 대규모 군사개입이 아닌 공중폭격과 CIA 특전단, 미군 특수부대 활용과 아프간 반군인 북부동맹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어, 개전 한 달 만에 수도 카불이 북부동맹에 함락된다. 이후 탈레반은 패퇴하여 파키스탄 인근 남부 산악지대에 은신하고, 빈 라덴은 도주한다. 아프간 전쟁은, 미국이 9.11 테러 공격을 받았고 빈 라덴이 탈레반의 보호 아래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국제적인 명분이 있었고, 나토 등 동맹국들의 참여도 적극적이었다.

그런데 손쉬운 승리에 취한 부시 정부는 아프간 상황을 안정시키고 탈레반 잔당들을 완전히 소탕하기보다, 또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린다. 2002년 1월 국정연설에서 부시는 이라크, 이란, 그리고 북한을 ‘악의 축(Axis of Evil)’이라 지목한다. 이 표현은 과거 제2차 세계대전의 주적인 ‘추축국들(Axis powers, 독일, 이탈리아, 일본)’과 냉전기의 주적인 소련을 지칭하는 ‘악의 제국(Evil empire)’을 의도적으로 조합한 것으로, 세 국가들을 21세기 주적으로 규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과거의 적들만큼 위협적이지도 않았고, 상호간 동맹국도 아니었다. 북한은 두 중동국가와 별 관계가 없으며, 후세인 정권은 수니파, 이란은 시아파로 과거 거의 8년간 전면전을 치른 철천지원수였다. 또한 이들은 알 카에다와도 무관했다.

그런데도 부시는 후세인의 이라크가 알 카에다의 9.11 테러와 연관이 있으며, 대량살상무기를 비밀리에 개발하고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한다. 부시는 후세인이 대량살상무기를 테러리스트들에게 건네 미국에 사용할 수 있는데도 충분한 증거가 없다고 이라크를 내버려두면, 핵 테러 공격을 당해 미국 영토에서 버섯구름이 피어오르는 것을 볼 수도 있다며, 9.11의 충격에 사로잡힌 미국인들의 공포심을 부추겼다.

미국이 주장하는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개발에 대한 주요 증거는 세 가지였다. 1)이라크가 알루미늄 튜브를 수입했는데, 이것이 핵농축을 하기 위한 원심분리기를 만들 목적이라는 것, 2)아프리카의 니제르에서 옐로우케이크(핵무기 원료인 노란색을 띠는 우라늄 정광)를 수입했다는 거래 문서가 발견되었다는 것, 3)비행기를 개조해 무인기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미국을 상대로 생물학 무기를 사용하기 위한 장비라는 것 등이었다. 이 외에 국무장관 콜린 파월은, 이라크가 사찰을 피하기 위해 트레일러를 개조한 이동식 생물학 무기 시설을 만들어 활용하고 있다고 유엔에서 강조했다.

그러나 이라크에서 대량살상무기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이후 미국의회 차원에서 이를 조사해 이라크전 정보력 실패에 대한 보고서를 발간했는데, 그에 따르면 위에서 언급한 근거들은 하나같이 과장되고 조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알루미늄 튜브는 재래식 무기인 로켓을 만드는 용도였고, CIA는 자체 실험을 통해 이것이 원심분리기에 사용되기 힘들다는 결과를 얻었음에도, 그것이 핵농축을 위한 것이라는 같은 주장을 고집했다. 옐로우케이크 거래 문서도 한눈에 가짜임을 알 수 있는 조잡한 위조문서로 드러났으나, CIA는 이를 부시에게 보고해 부시가 국정연설 중에 전 국민 앞에서 그것을 사실인 양 강조하기도 했다. 미 공군의 분석에 따르면 무인기 개조도 생물학 무기 살포가 아닌 정찰기 목적일 가능성이 높았으나, 이 역시 CIA에 의해 무시되었다. 이동식 생화학 무기에 대한 정보는 ‘커브볼’이라는 암호명의 이라크 망명자에게서 나온 정보였는데, 그는 이라크 정부에서 일한 적이 없는 성범죄자였다. 난민 캠프에서 벗어난 그는 CIA에게 보상을 받기 위해 모든 정보를 자신이 꾸며냈다고 실토했다. 또한 체니 부통령은 후세인과 알 카에다의 연관성을 주장하며, 알 카에다 멤버인 모하메드 아타가 9.11 직전 체코에서 이라크 요원과 접촉했고, 알 카에다와 연관된 알 자르카위가 이라크 정부와 접촉했다고 주장했으나, 그것 역시 모두 근거 없는 주장이었다.

무슬림이었지만 세속주의 독재자였던 후세인은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 조직인 알 카에다의 이라크 활동을 경계했다. 뿐만 아니라, 알 자르카위도 후세인 치하에서는 활동이 없다가 이라크 전쟁이 일어난 혼란을 틈타 알 카에다 지부를 이라크에 창설하고 발전시킨 것이었다. 즉, 알 카에다-후세인 커넥션 의혹은 2003년 이라크 침공의 주요 명분이었으나, 실제로 이라크의 알 카에다 지부는 이라크 전쟁 개전 이후 2004년에 창설된 것이었다.

이라크 전쟁으로 벌어진 참혹한 결과를 생각하면, 이런 엄청난 결정이 위와 같이 황당한 증거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전쟁의 명분이 거짓으로 드러나자 부시 정부 인사들은 자신들은 CIA 등 정보기관이 제공한 첩보들을 그대로 믿었을 뿐이라고 핑계를 댔다. 그러나 당시 CIA와 정보 분석가들은 이미 부시 정부가 이라크와의 전쟁을 향해 달려가고 있음을 알았고, 부시 대통령, 체니 부통령, 럼스펠드 국방장관 등이 계속해서 이라크와 알 카에다의 연관성, 대량살상무기의 증거를 찾아내라고 압력을 넣자 그들의 입맛에 맞는 첩보를 만들어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이러한 첩보들도 하나의 명분일 뿐이었고, 부시 정부는 9.11 전후에 이미 이라크전을 계획하고 있었다는 증언들도 많이 공개되었다.

부시 정부의 대테러담당 조정관인 리처드 클라크는 9.11 이전에 자신이 알 카에다의 테러 가능성이 높다고 미리 경고했으나 부시 정부의 네오콘들은 이를 무시하고, 빈 라덴보다 후세인 정권 전복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고 폭로했다. 이들 네오콘들은 이미 1991년 걸프전 당시 후세인의 이라크 정부 전복을 주장했으며, 언젠가는 끝내야 할 숙제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클라크에 따르면 펜타곤이 공격받아 아직 불타고 있는 9.11 당일 저녁에 이미 럼스펠드는 이라크 침공을 언급했다고 한다. 이후 럼스펠드는 9.11은 “세계 질서를 재편할 기회를 제공했던 제2차 세계대전과 같은 기회를 주었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국방부 부장관이자 유명한 네오콘인 폴 월포위츠 역시 이라크를 점령해 석유자원을 활용하면 전쟁 비용도 자체 조달 가능하다며, 이라크 침공을 적극 주장했다. 체니는 과거 할리버튼의 CEO였는데, 전쟁이 개시되자 그의 회사는 국방부로부터 천문학적 규모의 수주를 따냈다. 또한 그는 전쟁 직전에 에너지 회사 CEO들과 비밀 모임을 가졌는데, 그 모임에서 오간 문서에는 이미 이라크 유전의 위치와 그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석유기업들의 목록이 언급되어 있었다는 것이 정보 공개법에 따라 드러나기도 했다.

NATO 사령관직 등을 역임하고 퇴역한 4성 장군 웨슬리 클락도 2007년, 진보 매체인 <데모크라시 나우(Democracy Now)>에 출연해 충격적인 인터뷰를 한 바 있다. 9.11 직후인 9월 20일, 클락은 미 국방부에 방문해 럼스펠드와 월포위츠 등을 만나고, 아래층의 합동참모본부에서 과거 자신과 일했던 한 장성을 만났는데, 그는 조용히 “그들이 이라크를 침공하기로 결정을 내렸다”라고 전해주었다는 것이다. 몇 주 후, 아프간 공격이 시작되자 클락은 다시 펜타곤을 방문해서 같은 장성에게 ‘이라크를 정말 침공하냐’고 물었는데, 그는 럼스펠드에게 받은 메모를 가리키며 그들은 이라크뿐 아니라 향후 5년간 7개의 중동국가를 제거하기로 결정하고, 이라크로부터 시작해, 시리아, 레바논, 리비아, 소말리아, 수단,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란을 끝장낼 거라고 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라크 전쟁이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었기 때문에 리스트의 모든 국가들로 공격이 진행되지는 않았지만, 돌아보면 이라크와 리비아는 정권 교체가 이뤄졌고, 시리아에도 내전과 군사개입이 있었다. 만일 이슬람국가IS의 발흥과 러시아의 개입이 아니었다면 시리아 정부도 붕괴되었을 것이다.

특히 네오콘들은 상당수가 유대계거나 확고한 친이스라엘 정책으로 유명한 인사들로, 이러한 거대 전략의 주목표가 중동에서 이스라엘의 적들을 하나하나 제거하려는 것이 아닌지 의심된다. 지정학적인 중요성이 적은 레바논, 소말리아, 수단을 제외하면, 이제 이스라엘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세력은 이란뿐이며, 미국과 이스라엘의 강경파는 이란 공격을 오래전부터 거론해 왔다. 문제는 소수의 네오콘들이 미국의 국민이나 의회가 알기도 전에, 전쟁 명분인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나 알 카에다와의 연관성이 논의되기도 전에, 이러한 무시무시한 결정을 내리고 세계를 전쟁으로 몰아갔다는 사실이다. 즉, 이들은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자신들의 숙원인 이라크 전복과 중동 질서 재편을 실현할 절호의 기회로 9.11을 적극 활용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 벌어진 엄청난 파국에 대해 책임을 지거나 감옥에 간 사람은 없었다.

과거 미국의 이란, 이라크 정책도 이라크 침공의 모순과 이중성을 잘 보여준다. 1953년 미국은 석유 국유화를 추진하던 이란의 모사데크 정부를 CIA 비밀작전으로 뒤엎고, 친미세력인 샤의 절대왕정 체제를 만든다. 그 역풍으로 1979년 이슬람 혁명이 발생해 이란은 반미국가로 선회한다. 이슬람 혁명의 수출과 국내의 시아파를 우려했던 이라크의 후세인이 1980년 이란을 침공해 1988년까지 양국은 엄청난 소모전을 벌이게 된다. 이때 반미국가가 된 이란을 미워한 미국은 직간접적으로 후세인을 지지하고, 심지어 이라크의 민간인 학살과 화학무기 사용도 묵인한다.(다른 한편으로, 미국은 이란-콘트라 사건에서 보듯 비밀리에 이란에 무기를 판매하기도 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후 미국이 요구하는 이라크 석유산업의 민영화를 후세인이 거부하면서 둘 사이는 틀어지고,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부터 시작해 걸프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거치면서 미국은 마치 후세인을 절대악인 것처럼 규정하기도 했지만, 사실 미국은 이처럼 후세인을 지원했던 과거가 있다.

외교 전략적인 측면에서 부시 정부의 또 하나의 중대한 오류는 알 카에다 같은 테러조직과 후세인의 이라크 같은 독재국가를 동일하게 취급한 것이다. 테러조직은 영토와 본부가 없고 자살공격을 감행해서 ‘보복에 대한 두려움’을 기반으로 한 억제전략을 적용하기 힘들다. 하지만 후세인의 이라크는 독재국가일지언정 미국의 보복을 두려워하고 생존을 우선시하는 국가로서, 미국을 선제공격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대량살상무기도 없었지만, 그것이 있었더라도 미국에 사용하거나 테러조직에 넘겨 미국을 공격한다면, 역시 보복을 당해 이라크는 종말을 맞았을 것이다. 결국 미국은 선제공격이 아니더라도 억제 전략을 통해 충분히 대응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미국은 무리하게 이라크에 대한 전면 침공을 시작했고, 결국 중동에서 지옥의 문을 열게 되었다.

이 와중에 한국계 법학자이자 버클리 교수 출신으로 체니 부통령에게 법률자문을 했던 존 유는 대테러전쟁이라는 이름으로, ‘강화된 심문(enhanced interrogation; 각종 고문)’, ‘특별 송환(Extraordinary rendition; 고문이 가능한 나라로 테러 용의자를 납치하는 것)’, 그리고 ‘영장 없는 감시사찰(Warrantless Surveillance)’ 등을 합법화해 주었는데, 이는 아부 그레이브와 관타나모 기지 등에서 벌어진 악명 높은 인권유린과 가혹행위를 방조, 조장하는 빌미가 되었고, 부시 행정부는 견제장치 없이 더 막강해졌다.

2003년 3월 20일 이라크 전쟁이 시작되고, 미국은 대량 공중폭격과 지상군 투입으로 간단히 후세인 정부를 붕괴시켰는데, 이를 기념하여 부시는 5월 1일 전투기로 항공모함 갑판에 착륙해 ‘임무 완수(Mission Accomplished)’를 선언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그러나 이는 임무 완수가 아닌, 긴 악몽의 시작이었다.

2004년 미국은 이라크 정부를 회복하고 군대를 육성해 이라크를 간접적으로 통치하겠다는 ‘이라크화(Iraqification)’ 전략을 추진하는데, 이는 처참하게 실패한다. 중동 국경은 과거 오스만투르크 제국을 붕괴시킨 영국과 프랑스가 임의로 정했기 때문에, 이라크는 다수인 시아파, 그리고 수니파와 쿠르드족의 세 그룹이 한 나라로 묶인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국내적으로는 수니파인 후세인이 이라크에서 장기 집권하면서 다수인 시아파를 누르고 세력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고, 국외적으로는 수니파 종주국 사우디와 시아파 종주국 이란 사이에서 민감한 균형이 유지되고 있었다. 그런데 미군이 후세인의 수니파 정부를 붕괴시키고, 정부와 군대에서 수니파를 하루아침에 쫓아냈다. 부시 정부는 후세인의 독재를 무너뜨리고 자유선거를 실시하면 민주주의가 쉽게 정착되리라는 단순한 사고로 접근했지만, 수십 년간 민주주의를 경험하지 못한 채 세 그룹으로 철저히 분열되어 있던 이라크에서 자유선거는 오히려 나라를 혼란에 빠뜨렸다. 새로운 정부를 시아파가 주도하게 되자, 기득권을 잃은 수니파는 미군에 대항해 게릴라전을 펼치고, 시아파와는 내전을 시작한다. 이에 종교적으로 수니 국가인 사우디와 걸프 국가들은 이라크 수니파를, 시아파 종주국 이란은 이라크 시아파를 지원해, 이라크와 중동은 함께 대혼란에 빠져들어 간다.

럼스펠드는 대규모 지상군보다 기술력과 기동성에 집중해 이라크와 아프간 두 개의 전쟁을 한 번에 치를 수 있다는 자신의 주장에 집착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아프간과 이라크를 안정시키려면 더 많은 지상군이 필요하다는 장성들의 요청을 거절했는데, 이 역시 두 나라의 안정화를 어렵게 했던 요인이다. 미군의 강력한 화력과 기술로 적국의 정부를 붕괴시키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지만, 게릴라전에서 승리하고 국가를 안정시키려면 미군이 주요 지역을 장악하고 순찰을 강화해야 하는데, 이는 충분한 지상군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상황이 악화되자 2007년에 부시는 전략을 수정해 ‘이라크화’를 중단하고 ‘서지(The Surge)’, 즉 3만에 달하는 병력을 증파해 이라크에 주둔하는 미군은 17만 명에 이르게 된다. 그로 인해 단기적으로는 상황이 호전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장기간의 군사개입에 대한 미국인들과 이라크인들의 피로감은 커져만 갔다. 2007년 조사에 따르면 78%의 이라크인들은 미군의 존재가 갈등을 더 유발한다고 생각했고, 71%는 상황의 개선 여부와 상관없이 미군의 전면 철수를 바란다는 여론이 나왔다. 그에 따라 2008년 대선에서 당선된 오바마는 이라크 철군을 추진하게 되고, 2011년에 철군을 완료한다.

 

3. 시리아 내전과 이슬람국가IS의 흥망

세계를 공포에 떨게 했던 이슬람국가IS의 부상은 이라크의 불안정과 시리아의 내전을 배경으로 한다. 알 카에다-후세인 커넥션으로 부시 정부에게 지목된 알 자르카위는 2003년 이라크 전쟁이 시작되자 유명세를 타기 시작해, 2004년에 이라크에 알 카에다 지부를 만들고, 2005년에는 시아파에 전면전을 선포함으로써 수니파를 규합한다. 그러나 2006년에 그는 미군에 의해 살해당하고, 2007년 미국 병력 증파 이후 알 카에다의 활동은 잠시 소강상태에 빠진다. 이후 2010년에 미군이 철군하자 이라크의 알 카에다 지부는 ‘이라크 이슬람국가’라고 개칭하고,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라는 이슬람 성직자를 그들의 지도자로 세운다. 새로운 지도자 알바그다디라는 시리아 내전 중이던 2012년, 시리아에 병력을 파견해 알 카에다 시리아 지부를 만들고, 2013년 4월에는 두 나라의 지부를 통합해 ‘이라크 시리아 이슬람 국가’라는 의미의 ‘이슬람국가IS’를 창설한다. 원래 시리아와 이라크가 나눠진 것은 영국과 프랑스가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통해 인위적으로 국경선을 그은 것에 기인하는데, 이슬람국가IS는 이처럼 두 나라의 통합을 통해 제국주의의 흔적을 지우고 정교일치 사회인 칼리프 국가를 부활시킨다는 기치를 내걸고 시작된다.

그렇다면 시리아 내전은 어떻게 일어났는가? 중동의 많은 국가들은 독재와 부패, 가난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2010년경 튀니지에서 시작된 ‘아랍의 봄’이 중동국가들을 휩쓸기 시작한다. 수십 년간 아사드 가문의 독재하에 있던 시리아에서도 반정부 시위가 시작되고, 이를 정부군이 무력 진압하자 그에 저항하는 반군이 일어나 시리아 내전이 시작된다. 시리아 역시 프랑스에 의해 인위적으로 형성된 국가로, 수니파, 시아파, 알라위파, 그리고 시리아 정교회 등 다양한 종파가 섞여 있었다. 알 아사드 가문은 시아파의 소수 종파인 알라위파로, 다수인 수니파를 억압한 역사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반군은 처음에는 민주주의 저항군의 성격을 띠었으나, 갈수록 IS 같은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이 힘을 얻게 된다.

오바마 정부는 아프간과 이라크전의 피로감으로 시리아에 대한 전면 군사개입을 주저한 채, 공습과 반군 지원을 통해 아사드 정권이 붕괴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이란은 범시아파인 시리아를 지원했고, 시리아에 해군기지를 갖고 있는 러시아도 시리아를 지원하면서 전세는 더욱 복잡해진다. 아사드 정권은 반미주의와 반이스라엘을 지향해 왔고, 시아파 이란이 시리아, 레바논의 헤즈볼라, 가자 지구의 하마스 등과 협력해 반이스라엘의 축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아사드 정권을 붕괴시키고 싶어 했다. 그러나 내전으로 아사드 정부가 약화되는 틈을 타 수니파 중심의 IS가 이라크와 시리아 영토에서 엄청나게 성장하자, 이제 미국은 시리아에서 누가 이기기를 바라야 할지도 모르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결국 IS의 발흥은 부시의 이라크 침공의 결과라 할 수 있다. IS의 대부분은 후세인 정부에 있다가 미군에 의해 쫓겨난 자들이거나, 수니-시아 내전에서 원한을 품은 수니파들이었다. 부시 측은 오바마가 2011년 이라크에서 미군을 철수해 IS가 성장할 공간을 만들었다고 비판했지만, 사실 이라크와 미국의 여론을 볼 때 엄청난 숫자의 미군이 이라크에 영구 주둔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오히려 명분 없는 전쟁을 시작해 이라크를 혼란에 빠뜨리고 중동의 균형을 무너뜨린 부시 정부의 무책임한 침공 결정이 IS 발흥의 가장 큰 원인이라 할 수 있다.

테러조직인 알 카에다는 국가가 아니기에 영토를 점령하지 않고 정규군이 없이 테러공격만을 수행했으나, IS는 국가로서 영토를 점령하고, 세금을 걷고, 유전을 장악하여 석유를 판매하고, 정규군까지 운영했다. 그리고 인터넷 잡지를 발행해 자신들의 이념과 활동을 홍보하고, 채팅으로 지하디스트들을 모집하기도 했다. 심지어 포로를 참수하고 화형시키는 장면들을 고화질 영상으로 중계해 국제 사회에 충격을 주기도 했다. 미군이 육성한 이라크군은 치안과 방어에 무능했을 뿐만 아니라 IS의 공격에 도주하기 일쑤여서, 이들이 버리고 간 미국의 무기들과 장비들이 IS의 손에 들어가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IS의 성공과 확장은 근대 역사에서 언제나 미국과 이스라엘에 의해 패배만을 경험했다고 생각하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을 환호하게 만들었고, IS로 더 모여들게 했다.

2013년에 창설된 IS가 2014~2015년에 들어서 시리아와 이라크 영토의 절반 이상을 점령하자, 2016년부터 오바마 정부는 이들을 격퇴하는 것에 군사적 힘을 집중하게 된다. 오바마 정부가 아사드 정부를 지원하는 이란과 2015년 핵 합의를 체결하고 관계 개선을 시도한 것도, IS라는 공동의 적이 생겨서였다. 이후 미군과 러시아군의 공습이 지속되고, 터키군, 시리아 정부군, 쿠르드계 시리아 민주군, 이라크 정부군 등이 모두 이슬람국가IS와 맞서 싸우면서 이들은 점차 약화된다. 또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이 되고 난 2017년부터 시리아 반군, 쿠르드군 등에 대한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이 이루어져 그해 말에는 이슬람국가IS가 주요 거점을 잃고 크게 축소된다. 그리고 2019년 10월 리더인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가 미군 특수부대 작전으로 사망하면서, 이제 IS는 국가 형태가 아닌 각국의 지부들을 중심으로 테러를 이어가고 있는 형국이다. 결국 이들은 이라크와 시리아의 내전이라는 혼돈 속에 커 가다가, 위협을 느낀 주요 국가들의 집중 공격으로 붕괴하기에 이른다.

이로써 마침내 IS는 무너졌지만, 이라크전이라는 미국의 무모한 결정으로 시작된 연쇄 작용의 결과는 참혹했다. 2018년 통계에 따르면, 미국은 2003년 침공 이후 이라크에 7500억 달러가량을 쏟아부었으며, 전쟁으로 인해 이라크 민간인 60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미군의 피해도 적지 않았는데, 미군 전사자는 5천여 명, 부상자는 3만여 명이 넘었고, 미군의 자살률은 2001년 이후 31%나 증가했다. 한편 IS도 시리아와 이라크에서 민간인 15만 명을 살해했고, 국제 테러로 2천 명 이상을 살해했다. 결과적으로, 시리아에서는 10년간의 내전을 통해 40만 명 이상이 사망하고, 국민의 절반 이상이 난민이 되었다. 숫자로 보아도 엄청나지만, 그 뒤에는 상상할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과 고통이 배어 있다.

 

4. 아프간의 혼란과 미국의 철군 결정

앞서 말했듯, 부시 정부는 2001년 10월 아프간을 침공해 탈레반 정부를 손쉽게 함락시킨 후 관심을 이라크로 돌렸다. 2002년 1월 국정연설에서 부시는 ‘악의 축’을 언급했고, 2002년 3월 12일 언론 브리핑에서는 빈 라덴의 테러 네트워크가 무력화되었기에 그를 추적하는 데 큰 관심이 없다고 밝힐 정도였다. 이후 미군 병력 상당수가 아프간을 떠나게 된다. 그런데 미국이 이라크의 수렁에 빠져드는 동안, 탈레반은 아프간에서 다시 전열을 정비하고 게릴라전으로 세력을 확대해 나간다.

한편 대통령이 된 오바마는 부시와 반대로 이라크에서 철수를 하고, 9.11과 관계있는 아프간전에 집중하기 원했다. 그에 따라 오바마는 2009년 아프간에 병력을 증파했고, 2011년에는 마침내 오사마 빈 라덴을 파키스탄에서 사살하기에 이른다. 이후 2014년에 나토군이 아프간에서 철수하고, 미군도 아프간 정부와 군대에 역할을 넘겨주고 발을 빼고자 한다. 그러나 탈레반의 공세가 점점 강해지는 가운데, 2015년 미국은 급기야 철군을 취소한다. 당시 카르자이의 아프간 정부는 부패와 무능으로 악명이 높았고, 카불 외부 지역을 제대로 통제하지도 못했다. 이라크에 이어 시리아 내전이 시작되고 IS가 발흥하면서, 중동 개입에 대한 미국인들의 피로감은 더욱 높아졌다. 결국 오바마도, 트럼프도 중동에 대한 군사개입을 최소화하는 가운데, 탈레반과의 협상을 시작한다.

2020년 2월 트럼프는 아프간에서의 미군 철수 방침을 밝혔고, 바이든은 금년 4월 완전 철수를 결정했다. 특히 바이든은 9.11 20주년 이전에 미군 철수를 완료하여 손을 씻으려 했는데, 그는 적어도 카불이 탈레반에 위협받는 일은 1년 이상 걸릴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미군의 빠른 철수는 탈레반의 공세를 오히려 가속화했고, 아프간 대통령이 도망치고 탈레반이 예상보다 빨리 카불을 함락하는 초유의 상황을 초래했다. 결국 미국은 헬기를 동원해 자국 대사관 직원들을 탈출시키며, 1975년 4월 베트남의 사이공 탈출과 유사한 장면을 연출하고 말았다.

9.11 직후 시작되어 20년간 지속된 아프간 전쟁은 미국 역사상 최장기 전쟁이다. 이 전쟁으로 미국은 2조 달러 이상을 지출하고, 미군도 2400여 명이나 사망했다. 또한 아프간 정부군에서는 65,000여 명, 탈레반 등 반군 측에선 75,000여 명이 사망했고, 민간인 피해는 추산이 불가능할 정도이다. 그런데도 안정적인 민주 국가 수립은 고사하고 미국이 지원한 아프간 정부는 너무나 힘없이 무너져 내렸으며, 미국이 패퇴시켰던 탈레반은 다시 아프간을 장악했다.

 


5. 무엇을 배우고 기억할 것인가?

미국의 20년 군사개입은 정책결정자들과 국민들이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미국의 외교정책을 보면 실용주의만 강조하고, 역사의식과 성찰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프간은 국토 대부분이 험준한 산악지대로 게릴라전에 용이하고 국민성도 용맹하여, 그 이전에도 수많은 강대국들이 점령하기 어려웠던 땅이다. 멀게는 알렉산더 대왕도 고전했고, 대영제국도 세 번의 전쟁을 치르고 겨우 빠져나왔으며, 소련도 1979년부터 10년의 악몽을 치룬 터라, 소위 ‘제국의 무덤’이라 불리던 나라였다. 미국은 소련을 아프간에 끌어들여 10년의 악몽을 선사했음에도, 자신도 그 땅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무모함을 보였다. 이로써 미국은 역사를 기억하지 않는 자에 대한 저주를 톡톡히 경험한 셈이다.

이런 점에서 1980년대에 폴 케네디가 《강대국의 흥망》에서 소개한 ‘제국적 과잉팽창(Imperial overstretch)’의 문제의식은 오늘도 유의미하다. 조작된 것으로 폭로된 1964년의 통킹만 사건 이후 미국은 베트남에 10년여 동안 전면적인 군사개입을 했으나, 결국 1975년 패배하고 철수했다. 46년이라는 시간차가 있지만, 초강대국 미국은 역사의 교훈을 잊고 제국적 과잉팽창을 했다가 제3세계의 게릴라전에 패배하고 쫓겨난 것이다. 베트남과 이라크에서 보듯 정당한 명분 없이 시작된 전쟁은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 그리고 전쟁 당사국 국민들에게서도 지지를 받을 수 없고, 성공할 수 없음을 증명한다.

지난 20년은 초강대국 미국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미국은 군사력으로 한 국가를 붕괴시키는 데는 유능했으나, 민주적이고 안정적인 정부를 세우는 데는 극도로 무능했다. 국제정치 이론 중에 ‘민주평화론’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나 통계적으로 민주주의 국가들은 서로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부시는 이 개념을 이용해 독재 국가를 침공해 붕괴시키고 민주주의 국가로 전환시키면, 세계는 평화로워진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이 이론 자체는 국민 스스로 민주주의를 이룬 안정적이고 성숙한 민주국가들끼리는 서로 전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시가 말한 군사개입으로 독재국가를 민주국가로 ‘전환’시킨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고, 매우 오만한 허풍이었다. 미국은 평화를 이야기했지만, 도리어 전쟁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안정을 깨고 파괴와 혼란을 가져왔다. 아프간의 탈레반,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 시리아의 알 아사드 정권, 리비아의 카다피 정권 등은 비록 독재였으나 안정적인 정부였다. 이들 국가 중 미국의 개입으로 과거보다 안정적이고 평화로워졌다고 할 만한 곳은 없다. 민주화의 이름으로 살육과 파괴가 벌어지고, 최소한의 사회적 안정조차 무너진 참상을 생각하면, 이 나라의 민중들은 차라리 독재국가 시기를 그리워할지도 모른다. 오랜 기간 독재하에 있었던 이 나라들에는 민주주의적 주체가 없었고, 인종적・종교적으로 분열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 근본주의, 극단주의가 세력을 얻어가는 상태에서 통합적인 정부를 세우는 것도 쉽지 않았다. 게다가 미국에 일방적으로 기댄 무능하고 부패한 정부가 국민들의 지지를 받기도 어려웠다.

중동 개입은 미국의 정치에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미국인들이 9.11로 받은 충격은 이해하지만, 그들은 역사적으로 이 사건을 성찰하는 데 실패하고, 애국주의와 분노, 공포에 사로잡혀 부시와 네오콘들에게 백지수표를 써 주었다. 이는 민주주의의 견제와 균형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국익을 위해 중동을 재편하려던 이들은 9.11을 명분으로 아프간, 그리고 이라크, 시리아, 리비아 등에 20년간의 정치적 개입을 진행하고, 수많은 이들의 삶을 지옥으로 몰아넣었다. 부시는 이라크 전쟁의 와중에 침체된 경기를 인위적으로 부양하려고 월스트리트의 로비를 받아 서브 프라임 모기지 규제들을 대폭 완화했다가 2008년 경제위기를 발생시키기도 했다. 이는 미국의 국력이 쇠퇴하고 중산층이 몰락하며, 중국의 부상으로 미중 갈등이 격화되는, 그리고 유럽으로 난민이 몰려들어 사회복지 체제가 위기를 맞고, 유럽과 미국에서 극우 인종주의가 발흥하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의 중산층은 끝없는 중동 개입과 경제위기, 세계화와 일자리 상실 등에 분노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러한 심리는 트럼프 현상으로 이어졌다. 실제로 이라크 전쟁과 2008년 경제위기 등에 가장 큰 책임은 공화당 부시 정부에 있었고, 오바마는 부시가 터뜨린 재앙을 수습하느라 바빴다. 중산층의 삶은 쉽게 나아지지 않았고, 스티브 배넌 등은 민주당과 공화당의 엘리트들을 싸잡아 비난하며, 워싱턴 아웃사이더인 트럼프를 대안으로 내세워 국민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트럼프가 군사개입을 자제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자신이 상위 1%의 일원이었던 그는 미국의 경제 구조를 개혁하기보다 중산층의 분노를 이민자들이나 중국으로 돌리기에 바빴다. 또한 트럼프는 코로나 팬데믹 대응에 처참히 실패했고, 그의 집권 기간 동안에는 가짜 뉴스와 인종주의가 판을 쳤다. 급기야 트럼프는 대선 결과를 부정함으로써 국회의사당이 그의 지지자들에 의해 공격받는 지경에 이르도록 했다.

미국인들은 ‘중국 위협론’을 강조하지만, 중국과 미국의 격차가 좁혀진 것은 사실상 20년간 중동에서의 끝없는 전쟁으로 국력을 소모하고, 2008년 경제위기부터 월스트리트와 1%를 대변하는 정책으로 중산층을 몰락시킨 미국 지도자들이 자초한 바가 크다. 이제 트럼프의 미중 무역전쟁 이후 바이든도 어떤 방식으로든 중동보다는 중국을 견제하고 미국의 경제와 패권을 재건하는 데 집중할 가능성이 크다. 심지어 아프간에서 철군해 탈레반이 집권하도록 두는 것이 중국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중국은 이슬람주의의 확산과 소수민족들의 분리독립 시도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신장의 위구르 인들을 극심히 탄압하고 있다. 그런데 와칸회랑을 통해 신장에 연결되는 아프간의 탈레반이나 외부 이슬람 세력이 위구르와 연대한다면 중국의 안정에도 위협이 될 것이고, 혹시라도 중국이 군사개입을 한다면 소련, 미국이 경험한 악몽을 재현할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1980년대 미국의 사이클론 작전에서 파키스탄 정보국은 소련을 아프간에서 몰아내는 것을 넘어, 이슬람주의를 소련 내로 수출해 소련 해체와 더불어 구소련 국가들 중 6개 이슬람 국가 건설을 지원했었다. 물론 탈레반 정부는 현재 다소 온건한 입장을 표명하고 있고, 최근 파키스탄 정부도 매우 친중적인 행보를 보이는 가운데, 중국의 왕이 외교부장이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탈레반 지도자와 만나 이슬람 세력에 대한 적극적인 관리에 나서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의 상황은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한편, 미국의 중동 개입은 한국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부시가 당선된 후 ‘악의 축’을 발표하며 조성한 긴장 국면 속에서, 2002년 2차 핵 위기가 터졌다. 그에 따라 클린턴-김대중 시기 진행되던 대북 협상과 제네바 합의는 중단되었고,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부시 정부와 대북정책을 공조하는 데도 큰 애를 먹었다. 부시는 기독교 근본주의적 관점과 단순한 선악의 논리로 북한을 인식했으며, 부시 정부에도 북한을 제대로 이해하는 전문가가 드물었기 때문에, 미국은 북한의 특수상황을 고려하기보다 북한 문제를 대테러전쟁의 하위 과제로 다뤄 한반도의 상황을 꼬이게 만들었다.

또한 부시 정부는 이라크전을 추진하면서 기존 동맹국들에게 큰 지지를 받지 못하자 노무현 정부에 파병 압력을 넣었고, 이는 한국 정치에 큰 갈등과 파장을 몰고 왔다. 일설에 따르면 당시 한미 관계 역사상 최대의 압력이 왔다거나, 이라크 파병을 하는 대신 북한 문제에 유연하게 접근해 달라는 일종의 빅딜이 있었다는 관계자의 말도 있었다. 한국 사회는 보수와 진보로 갈라져 논쟁이 벌어졌다. 부시 정부에 비판적인 진보세력이나 평화주의 입장에서는 정당성이 없는 불의한 전쟁에 참여하는 오점을 남겨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고, 보수 쪽에서는 이라크 전쟁을 찬성하며 한미동맹과 한국의 국익을 생각해 적극 파병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정치적으로 진보개혁 세력의 지지를 받은 노무현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곤혹스러운 상황이었고, 전투병이 아닌 평화지원 중심의 파병을 일종의 타협으로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한미 관계의 특수성과 한반도 상황 등을 고려할 때, 미국의 요구를 완전히 거절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라크 전쟁은 전쟁 명분도 증명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도 완전한 실패였다. 여기서 우리는 원칙을 굽히고 현실주의적 선택을 해서 얻은 국익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질문해 볼 필요가 있다.

앞으로도 이와 비슷한 상황은 한국의 현실 속에 언제든 닥칠 수 있기에, 이 사건을 복기하고 교훈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현실주의적 국익, 그리고 진보와 평화의 원칙 사이에서 합리적인 토론과 접점을 찾아가는 것, 한반도의 분단 상황과 북한의 핵 문제, 미국과의 동맹 관계라는 현실 속에서, 분단을 극복하고 한국의 자율성을 확보해 나가며, 정의와 평화를 우리의 현실로 끌어올 수 있기 위해서는 다각적인 노력과 관련국과의 지속적인 대화가 필요하다.

9.11 20주년과 미국의 중동 군사개입 20년을 복기하며, 고통받은 수많은 이들을 추모한다. 그리고 역사를 바르게 기억하고, 갈등과 두려움, 군사력과 안보에 대한 집착을 넘어, 정의와 평화를 우선하는 세상을 꿈꾸어 본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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